산행기/한국의 100대 명산

연재ㅣ옛 문헌에 나오는 '한반도 명산'

화이트보스 2020. 2. 17. 17:35


연재ㅣ옛 문헌에 나오는 '한반도 명산'<3>ㅣ조선왕조실록 ②] 악·해·독 중사, 山川 소사로 지정 산천제 지내

입력 2020.02.17 10:25

산의 규모 차이로 나눈 듯… 오악은 태종까지도 미지정
산천제 성격은 고려까지 호국용, 조선 들어서 기우제로 바뀌어

<태종실록>28권 태종14년(1414)에 예조에서 산천山川에 지내는 제사에 대한 규정, 즉 사전祀典제도를 올렸다.
‘삼가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를 보니,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하였고, 산山·임林·천川·택澤은 소사小祀로 하였고,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송나라 제도에서도 또한 악·진·해·독은 중사로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전조前朝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여러 산천을 빌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등제를 나누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경성 삼각산의 신·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진,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백산,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이었고, 경성의 목멱, 경기의 오관산·감악산·양진, 충청도의 계룡산·죽령산·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주흘산, 전라도의 전주 성황·금성산, 강원도의 치악산·의관령·덕진명소德津溟所, 풍해도의 우이산·장산곶이·아사진·송곶이, 영길도의 영흥성황·함흥성황·비류수, 평안도의 청천강·구진익수九津溺水는 모두 소사이니, 전에는 소재관에서 행하던 것이다. 경기의 용호산·화악, 경상도의 진주성황, 영길도의 현덕진·백두산은 모두 옛날 그대로 소재관에서 스스로 행하게 하고, 영안성·정주목감貞州牧監·구룡산·인달암因達巖은 모두 혁거革去하였다. 또 아뢰었다. 
개성의 대정大井·우봉牛峯·박연朴淵은 이미 명산대천이 아니니, 빌건대, 화악산·용호산의 예에 의하여 소재관에서 제사를 행하게 하소서.’
조선 초기부터 산천제를 지내는 명산대천의 기준은 전 왕조를 따르면서 태종 들어서 중사와 소사를 확실히 구분했다. 이전까지는 기준이 없거나 애매했다. 태종 때의 기준이 조선 내내 거의 비슷하게 적용됐다. 조선 초기에는 오악의 대상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물론 조선은 왕이 바뀔 때마다 오악의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했다. 그 큰 틀이 중사는 악해독, 소사는 여러 산천이다.
그러면 중사의 악해독과 소사의 산천의 차이는 뭘까? 중사와 소사로 나눠진 대상으로 보면 규모의 차이 외에는 별다른 기준을 찾을 수 없다. 중사의 산들은 삼각산, 송악산, 가야산, 지리산, 비백산 등이고, 소사의 산들은 오관산, 감악산, 계룡산, 죽령산, 우불신, 주흘산, 금성산, 치악산, 우이산 등이다. 중사의 산들은 규모면에서 조금 더 크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산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소사는 사실상 중사의 산들과 별 차이는 없지만 지역의 대표성에서 조금 떨어지는 차이밖에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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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종실록>에 나오는 산천에 지내는 제사에 대한 규정. 2. <세종실록>에 나오는 풍수에 관한 기록.
중사와 소사는 대표성의 차이인 듯
중사와 소사를 정한 이유는 통일신라와 고려까지는 지방을 대표하는 산과 강을 지방호족을 통해 관리하는 동시에 이들을 중앙으로 진출하도록 유도하는 역할과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 또한 이들에게 때로는 하늘의 산신에게 국가의 안위와 외침을 막는 산천제를 올리도록 했다. 다시 말해 중사와 소사의 지정을 통해 전국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서 명산대천에 지내는 산천제는 완전히 기우제로 성격이 바뀐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조는 산천제 또한 지방 소재관으로 지내도록 했다. 지방 호족의 세력도 이전 왕조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 내용이 기록에 고스란히 전한다. 
태종 16년에는 의정부·육조·대간에서 한재旱災(가뭄 피해)를 구제하는 방책 일곱 가지를 올린다. 죄수를 석방하고, 미결수를 배려하고, 노비를 보살피고, 세금을 감면하고, 마지막에 명산대천으로서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있는 곳에 소재관으로 하여금 정성껏 기도하게 할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즉시 예조에 내려서 중외에 포고하고, 석척 기우제를 광연루 아래에서 행하고, 북교에서 기도하고, 호두를 한강에 가라앉혔다고 나온다. 석척 기우제는 도마뱀을 병 속에 넣고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도마뱀이 용과 비슷하기 때문에 용의 응험應驗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 2년(1420)에 <조선왕조실록>에 오악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다. 
‘예조에서 다시 오악과 강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우제를 지낼 것을 고하다’는 대목에서 ‘일찍이 왕지를 받들어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는 것과 사직단·종묘·오악·바다·강·명산·큰 내에 나아가 기우제 지내는 것을 거행하지 아니한 곳이 없었사오나, 이제까지 비가 오지 아니하오니, 다시 오악과 강에서부터 시작하여 처음과 같이 기우하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오악의 틀이 서서히 잡혀가고, 세종 19년(1437)에는 조선 8도의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했다. 여기 해당되는 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는 임강현의 오관산, 적성현의 감악산은 소사로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 해풍군의 백마산, 임강현의 용호산, 강화부의 마리산, 가평현의 화악산 등이 산천제로 지내는 산으로 지정됐다.
강원도는 원주의 치악산과 회양부의 의관령義館嶺이 소사이고 소재관이 제사 지낼 것이고, 홍천현의 팔봉산, 원주 관할 안의 주천현 거슬갑산 등에서 산천제를 지내도록 했다.
함길도 정평부의 비백산은 중사이고, 영흥부의 백두산이 산천제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충청도는 계룡산·죽령산은 소사이고, 진천현의 태령산, 덕산현의 가야갑 등의 산기슭에 조정해 치제할 것을 명했다.
전라도는 지리산이 중사, 금성산은 소사, 무진군의 무등산이 산천제 대상의 산이었다. 경상도는 울산군의 우불산이 소사이고, 상주 남술 서치봉, 문경 관할의 가은현 재목산, 호계현의 장산 등이 산천제 대상이었다. 황해도는 해주의 우이산이 소사이면서 산천제를 지내는 대상으로 지정됐다. 평안도는 산은 없고 강과 몇 군데를 지정해서 산천제를 지냈다.
특히 <세종실록>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비는 산천제를 지낸 기록을 남기고 있다. 농사 짓는 백성의 생활과 안위를 걱정하는 왕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명산은 산천제의 효험으로 결정됐을 수 있다는 추측을 남긴다. 비가 내릴 때까지 제사를 지내는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산천제, 즉 기우제의 효험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들 수밖에 없다. 그 기준으로 명산을 정했다면 또한 당연히 그 산이 명산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들 것이다. 어쨌든 조선의 명산은 기우제의 명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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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에 기우제를 지낸 기록.
기우제와 풍수는 조선시대 명산의 특징
조선의 명산에 대한 다른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풍수’와 관련해서다. 특히 <세종실록>에 매우 구체적으로 여러 차례 소개된다.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세종 30년(1448)에 ‘도성 내외의 산에서 채석을 금하자는 음양학 훈도 전수온의 상서’에 나온다.
‘(전략) 서울은 만수천산이 모두 일신으로 모여 들므로 천형만상이 다시 다른 뜻이 없어, 오행의 기가 온전하고 팔괘의 작용이 갖춰졌기 때문에 하나의 산도 공결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방위도 모여 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동림조담洞林照膽>에 말하기를, 돌은 산의 골격인데, 산에 골격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고, <명산론>에 말하기를 산이 산 되기를 흙으로써 살肉을 삼고 돌로써 골격을 삼으며, 초목으로써 모발을 삼는 것인데, 옛날에는 모발이 있어서 수려하던 것이 혹 홍수에 파손되었거나, 혹은 인력으로 상잔된 것을 파룡이라 한다. 파룡에는 거기 사는 촌리가 많이 파破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산에는 돌이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파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지금 도성 내외에 있는 산에 백성의 거주하는 것이 숲과 같아서, 흙은 파고 돌을 벌채하여, 찢기고 무너져서 풀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게 되고, 산의 면모도 이로 인하여 피약疲弱하게 되어 저렇게 벌거벗었사오니, 이것은 바로 장중헐에서 말하는 바 초목이 쇠잔하여 무너질 듯하거나 또 박약하면 출세한 사람이나 들어앉은 사람이 모두 곤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산 이외의 다른 방위에 있는 산은 방해될 것이 없다 한다면 신은 크게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종위從衛의 호탁하는 것이 형세는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모두 한 집안의 용이니만큼, 여기에 감촉을 받게 되면 저기에 응험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치와 형편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도성 내외의 산에서 공사 간에 채석하는 것을 일체 금단하여 산악의 기운을 보충하게 하소서. (중략)
도성 안에 있는 산에서 채석하는 것은 이미 법으로 금단시켰으며, 만일 밖의 산까지도 아울러 금지시키는 것은 옛적에도 그 의논이 없었사오니, 반드시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남산으로부터 전관산에까지 물을 거슬러 안이 되었으니, 음양이 교합됨이 지극히 굳고 주밀하여 길산이라 하겠고, 수구산으로부터 왕심역 서쪽까지는 일찍이 경종耕種을 금하였으며, 목역리 이동의 전관대로의 벌아현으로부터 외면外面의 산허리와 산발치까지도 또한 경전과 벌초를 금하여 산기山氣를 배양하소서.’
세종 중반기에 이르러 팔도의 산천제를 지내는 명산을 지정함과 동시에 풍수 관련한 명산의 산기를 지키려는 기록이 쏟아진다. 이로 미뤄 볼 때 조선의 명산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우제에 효험 있거나 풍수와 관련한 명당이 명산으로 인정된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