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3.09 03:05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18] 민족의 聖山 백두산 탐험
1930년 민족운동가 안재홍 '백두산 등척기' 34회 本紙 연재
6년 뒤 대규모 탐험단원 모집, 신문 사상 첫 단체 답사 나서
한라산·지리산 순례로 이어져
"걸음을 옮겨 고개 위에 다다르자, 검푸른 빛을 진하게 드리운 천지(天池)의 물이 그야말로 천지 석벽의 깊고 깊은 속에 고요히 담겨 수면의 깨끗함이 거울같이 곱다."
1930년 7월 조선일보 부사장과 주필을 지낸 민족운동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상보고대회로 4번째 옥고를 치른 직후였다.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을 쓴 수주 변영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인 김상용 등이 그의 백두산행에 동행했다. 천지에 오른 안재홍은 이렇게 감탄했다. "깎아지른 벼랑에 곧바로 쏘이는 태양이 찬란하고도 영롱하게 수면으로 광선을 내려놓아 빠른 바람에 주름져 퍼지는 물결이 가볍게 밀릴수록 천변만화의 색태를 드러낸다. 장엄하고 수려함을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1930년 7월 조선일보 부사장과 주필을 지낸 민족운동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상보고대회로 4번째 옥고를 치른 직후였다.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을 쓴 수주 변영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인 김상용 등이 그의 백두산행에 동행했다. 천지에 오른 안재홍은 이렇게 감탄했다. "깎아지른 벼랑에 곧바로 쏘이는 태양이 찬란하고도 영롱하게 수면으로 광선을 내려놓아 빠른 바람에 주름져 퍼지는 물결이 가볍게 밀릴수록 천변만화의 색태를 드러낸다. 장엄하고 수려함을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16일간의 답사를 마친 안재홍은 그해 8~9월 조선일보에 34차례에 걸쳐 '백두산 등척기(登陟記)'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이듬해에는 단행본으로 펴냈다. 안재홍의 기행문을 현대적 문장으로 풀어 옮긴 정민 한양대 교수는 "핵심을 놓치지 않는 꼼꼼한 묘사와 간결한 정리, 험난한 시국과 변경 주민의 간고한 삶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각이 균형을 잃지 않은 대문장"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백두산 기행문이 민족지를 통해서 쏟아졌다. 1921년 민태원의 '백두산행'과 1926년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1930년 안재홍의 백두산 등반에는 문인뿐 아니라 식물과 곤충 채집을 하는 교사들도 동행했다. 국권을 잃은 시기, 백두산 답사에는 '민족의 재발견'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안재홍 평전'을 펴낸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민족사를 되새기는 현장 답사를 통해서 민세는 1930년대 문자보급운동, 생활개신(改新)운동, 충무공현창운동, 조선학운동을 제창하거나 직접 간여하면서 민족문화운동을 앞장서 실천했다"고 평했다.
일제강점기에 백두산 기행문이 민족지를 통해서 쏟아졌다. 1921년 민태원의 '백두산행'과 1926년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1930년 안재홍의 백두산 등반에는 문인뿐 아니라 식물과 곤충 채집을 하는 교사들도 동행했다. 국권을 잃은 시기, 백두산 답사에는 '민족의 재발견'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안재홍 평전'을 펴낸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민족사를 되새기는 현장 답사를 통해서 민세는 1930년대 문자보급운동, 생활개신(改新)운동, 충무공현창운동, 조선학운동을 제창하거나 직접 간여하면서 민족문화운동을 앞장서 실천했다"고 평했다.
민세의 백두산 등반은 6년 뒤 조선일보의 대규모 탐사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936년 7월 14일 1면에 백두산 탐험단원을 모집하는 대형 사고(社告)를 실었다. '백두의 성산(聖山)! 조선인으로서 누가 이를 숭앙하지 아니할 자 있으며, 장백의 영봉(靈峯)! 백의인(白衣人)으로서 누가 이를 경모하지 아니할 자 있으리오.' 지면 거의 절반을 차지한 사고 문구부터 민족의식을 뚜렷이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신문사에서 대규모의 백두산 탐험단원을 모집해 단체 산행에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총 34명으로 구성된 탐험단은 동물학자, 식물학회 간사, 역사·지리교사, 의학박사 등 4~6명씩 5개 반으로 편성됐다. 조선일보에서도 주필 서춘을 단장으로 사회부장 이상호, 영업국원 방재윤, 사진기자 이종옥, 활동사진반 이명우·최운봉이 참가했다. 1936년 8월 7일 서울을 떠난 탐험단은 9일 백두산 부근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야영을 하면서 8월 13일 백두산 정상에 오른 탐험단원들은 바람과 추위 속에 만세 삼창을 했다.
총 34명으로 구성된 탐험단은 동물학자, 식물학회 간사, 역사·지리교사, 의학박사 등 4~6명씩 5개 반으로 편성됐다. 조선일보에서도 주필 서춘을 단장으로 사회부장 이상호, 영업국원 방재윤, 사진기자 이종옥, 활동사진반 이명우·최운봉이 참가했다. 1936년 8월 7일 서울을 떠난 탐험단은 9일 백두산 부근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야영을 하면서 8월 13일 백두산 정상에 오른 탐험단원들은 바람과 추위 속에 만세 삼창을 했다.
조선일보는 탐험대 소식을 15일 자 석간 1면부터 발 빠르게 보도했다. 현장 중계의 '주역'은 비둘기였다. 하루 비둘기 2마리가 다리에 기사를 매달고 백두산에서 날아가 조선일보 청진 주재 기자에게 기사를 전달했다. 도중에 비둘기 2마리는 수리의 공격으로 숨지는 일도 일어났다. 탐방단은 곤충 400여 점, 식물 2000여 점의 표본을 채집해서 18일 서울로 돌아왔다. 서춘 주필은 8월 23일 자부터 34회에 걸쳐 '백두산 탐험기'를 연재했다. 조선일보는 8월 27일부터 1주일간 백두산 보고대회
백두산 탐험 이후에도 학술 조사를 겸한 조선일보의 산악 순례는 이듬해 한라산(2회), 1938년 지리산(3회), 1939년 묘향산(4회), 1940년 설악산(5회) 등 강제 폐간 직전까지 계속됐다. 시조 시인이자 조선일보 출판주간이었던 이은상은 1938년 '지리산 탐험기'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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