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3.11 03:14
일제 때 강제 폐간당한 뒤 광복 후 5년 3개월여 만에 다시 발행
조만식·방응모·주요한 등이 정한 社是, 복간호에서 처음 해설
빼앗겼던 나라 되찾았지만… 그렇게 꿈꾸던 '내 나라' 갈 길 멀어
지난 100년 조선일보에 실린 논설 가운데는 명문으로 꼽히는 것이 많다. 창간된 지 5개월 만에 일제 경찰을 비판해서 첫 번째 정간을 당한 뒤 일주일 지나 정간이 풀리자 총독부를 다시 격렬하게 공격해 무기정간을 불러온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자는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再選)을 위해 무리수를 거듭하는 자유당 정권을 고발한 '이 대통령께 건백(建白)하나이다', 3·15 부정선거를 강력하게 규탄해 4·19혁명의 도화선을 당긴 '호헌구국(護憲救國)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임한 '조선일보 앞에 성역(聖域)은 없다', 북한의 조선일보 기자 입북(入北) 거부와 협박을 질타한 '조선일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등이 독자와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도 1945년 11월 23일 자 복간호에 실린 '속간사(續刊辭)'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강제 폐간당한 조선일보가 광복을 맞아 5년 3개월 13일 만에 다시 신문을 내면서 감회와 각오를 피력한 글이기 때문이다. 속간사는 그동안 '생벙어리'가 됐던 우리 민족의 답답함, 광복 이후 복간을 위한 노력, '자주독립의 깃발'이 날릴 때까지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大同)에 합류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1933년 제정, 일제 땐 신문에 공표 안 돼
조선일보 역사에서 복간호의 '속간사'가 중요한 것은 지금도 조선일보를 만드는 기본 정신이 되고 있는 '사시(社是)'가 처음 해설됐기 때문이다. '정의옹호·문화건설·산업발전·불편부당'의 사시는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인 1933년 4월 사장 조만식, 부사장 방응모, 전무 조병옥, 편집국장 주요한이 머리를 맞대고 정했다. 하지만 일제시기에는 신문에 공표된 적이 없다. 사시에 담긴 뜻을 진솔하게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패망으로 우리 민족을 옥죄던 족쇄가 풀리자 비로소 이를 널리 알리고 그 의미를 밝혔다. 그 속에는 당시 신문을 함께 만들었던 '조선일보 동인(同人)'들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공유했던 최대 공약수가 담겨 있다. 이는 광복 직후 우리 민족의 대다수가 바랐던 '내 나라'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도 1945년 11월 23일 자 복간호에 실린 '속간사(續刊辭)'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강제 폐간당한 조선일보가 광복을 맞아 5년 3개월 13일 만에 다시 신문을 내면서 감회와 각오를 피력한 글이기 때문이다. 속간사는 그동안 '생벙어리'가 됐던 우리 민족의 답답함, 광복 이후 복간을 위한 노력, '자주독립의 깃발'이 날릴 때까지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大同)에 합류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1933년 제정, 일제 땐 신문에 공표 안 돼
조선일보 역사에서 복간호의 '속간사'가 중요한 것은 지금도 조선일보를 만드는 기본 정신이 되고 있는 '사시(社是)'가 처음 해설됐기 때문이다. '정의옹호·문화건설·산업발전·불편부당'의 사시는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인 1933년 4월 사장 조만식, 부사장 방응모, 전무 조병옥, 편집국장 주요한이 머리를 맞대고 정했다. 하지만 일제시기에는 신문에 공표된 적이 없다. 사시에 담긴 뜻을 진솔하게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패망으로 우리 민족을 옥죄던 족쇄가 풀리자 비로소 이를 널리 알리고 그 의미를 밝혔다. 그 속에는 당시 신문을 함께 만들었던 '조선일보 동인(同人)'들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공유했던 최대 공약수가 담겨 있다. 이는 광복 직후 우리 민족의 대다수가 바랐던 '내 나라'의 모습이기도 했다.
속간사는 '정의옹호'에 대해 "여하한 불법한 권력에도 굴(屈)함이 없고 타협함이 없이 정의라고 인정되는 바를 철저히 옹호함으로써 우리 국민은 기회를 절대 균등히 하여 어떤 부분이고 어떤 당파이고 권세를 농단하며 경제를 독점함이 없게 하여 국민인 이상 적어도 최저생활은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를 주장한다"고 밝혔다. '정의옹호'에서 '권력 감시와 비판'을 앞세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인 '정의'를 '권세 농단과 경제 독점 배격' '국민의 기회균등과 최저생활 확보'로 구체화한 것이 이채롭다. 일제 식민지에서 민족적 차별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이 나라를 되찾은 뒤에 민족 내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다.
'문화건설'은 "짓밟혔던 우리 전래의 문화를 찾아내어 빛나게 하고 발전 향상시키어 조선의 독특한 문화를 건설하는 동시에 세계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하기를 기(期)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일제시기 문자보급운동, 장지영·홍기문·방종현 등의 국어 논설, 신채호·문일평·최남선 등의 역사 연재, 향토문화조사사업 등을 통해 민족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되찾은 나라에서 민족문화 발전에 더욱 힘쓰고 이를 통해 세계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권력은 감시·비판, 경제·문화 건설 중시
'산업발전'은 "우리의 힘과 자력(資力)으로 온갖 산업을 개발 진흥시키고 또 중요 산업은 국영(國營)으로 하여 국부(國富)를 증강시키는 한편 우리 겨레의 생활수준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경제와 산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일제의 민족 탄압에 맞서는 것이 당면 과제였지만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산업과 경제 건설 또한 중요하다고 보았다. 광복 직후 조선일보는 정치운동으로만 몰려가는 세태를 개탄하며 "독립의 첩경은 경제 회복이니 진정한 애국자라면 생산 현장으로 가라"고 외쳤다. '중요 산업의 국영'은 오늘의 관점에서 낯설 수 있지만 당시 기간산업이던 철도·전기 등이 지금도 공영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된다.
'불편부당'은 "어느 일당일파(一黨一派)에 기울어지고 치우침 없이 지공무사(至公無私) 시시비비(是是非非) 주의를 견지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고 비판함으로써 국민에게 정당한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광복 후 이념과 정파 대립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파쟁(派爭)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엄정중립이라는 신문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먹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빼앗겼 던 나라를 천신만고 끝에 찾은 75년 전 조선일보가 그렸던 '내 나라'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가. 물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가장 모범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는 자부심은 온당하다. 그럼에도 사회·문화적으로는 가야 할 길이 먼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일보 100주년에 복간호의 '속간사'를 읽으며 그 안에 담긴 뜻을 새겨본다.
'문화건설'은 "짓밟혔던 우리 전래의 문화를 찾아내어 빛나게 하고 발전 향상시키어 조선의 독특한 문화를 건설하는 동시에 세계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하기를 기(期)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일제시기 문자보급운동, 장지영·홍기문·방종현 등의 국어 논설, 신채호·문일평·최남선 등의 역사 연재, 향토문화조사사업 등을 통해 민족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되찾은 나라에서 민족문화 발전에 더욱 힘쓰고 이를 통해 세계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권력은 감시·비판, 경제·문화 건설 중시
'산업발전'은 "우리의 힘과 자력(資力)으로 온갖 산업을 개발 진흥시키고 또 중요 산업은 국영(國營)으로 하여 국부(國富)를 증강시키는 한편 우리 겨레의 생활수준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경제와 산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일제의 민족 탄압에 맞서는 것이 당면 과제였지만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산업과 경제 건설 또한 중요하다고 보았다. 광복 직후 조선일보는 정치운동으로만 몰려가는 세태를 개탄하며 "독립의 첩경은 경제 회복이니 진정한 애국자라면 생산 현장으로 가라"고 외쳤다. '중요 산업의 국영'은 오늘의 관점에서 낯설 수 있지만 당시 기간산업이던 철도·전기 등이 지금도 공영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된다.
'불편부당'은 "어느 일당일파(一黨一派)에 기울어지고 치우침 없이 지공무사(至公無私) 시시비비(是是非非) 주의를 견지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고 비판함으로써 국민에게 정당한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광복 후 이념과 정파 대립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파쟁(派爭)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엄정중립이라는 신문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먹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빼앗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