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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換)투기 세력과의 전쟁

화이트보스 2008. 10. 5. 11:14

환(換)투기 세력과의 전쟁

'신용전쟁'의 진짜 무서운 상대

외환보유액 아끼며 대비해야

박정훈 경제부장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위기 때의 해결사는 역시 정부뿐이다.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벤치에서 나와 '선수(플레이어)'로 뛰도록 만들었다. 평상시 감독·심판 역할을 하던 정부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금융시스템 방어를 위해 링 위에 올라갔다. 이제 우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정부가 승전고를 울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장을 맡은 정부 경제팀은 초반부터 적극 공세다. 달러를 풀고 각종 대책의 포탄을 쏘아대며 시장 불확실성의 조기 진압에 나섰다. 곳곳에서 펼쳐진 국지전에서 정부는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고 보는 모양이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 입에선 선제대응을 잘했다는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초반부터 실탄(實彈) 소모가 많다. 최후의 보루로 쌓아둔 외환보유액이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초반에 실탄을 퍼부어 단기전으로 끝낼 작정인 것처럼 보인다. 강만수 장관은 "필요한 만큼 외환보유액을 투입하겠다"고도 했다. 얼마든지 달러를 공급할 테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이 작전이 도리어 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를 내고 있다. 당장 달러 사정은 좋아질지 몰라도, 그만큼 외환보유액이 줄어든다는 것을 시장은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달러를 풀어도 환율은 반짝 하락뿐, 다음 날이면 더 뛰어오르곤 한다. 위기가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시장도 본능적으로 안다는 얘기다.


지금 진행되는 것은 기나긴 '신용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 진짜 무서운 상대는 아직 모습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정부가 진검(眞劍)승부를 벌여야 할 적은 우리의 외환 쪽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국제 환(換)투기 세력이다. 언제 닥칠지 모를 환투기 세력과의 일전에 대비해 실탄을 비축하고 아껴야 되는데, 정부의 달러 씀씀이는 헤프기만 하다.


환투기 세력은 하이에나 같은 존재다. 약한 상대만 노리고, 일단 공격하면 그 나라의 외환시스템을 초토화시킨다. 불행히도 한국은 이들의 먹잇감에 근접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정부의 환율 방어력이 충분치 않다고 의심받기 때문이다. 방어능력이 한계에 부닥쳤다고 판단하는 순간, 환투기 세력은 일제 공격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환투기 세력은 가공할 화력을 지니고 있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 같은 선진국 정부도 이들의 공격에 두 손 들었다(1992~93년 유럽의 통화위기). 최선의 전략은 공격 자체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우리가 약점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이미 환투기 세력과의 피 말리는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다.


정부의 외환 실탄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계 6위의 외환보유국이다. 평소 같으면 외환보유액 2400억 달러로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상시 셈법이 통하지 않는다. 국제시장의 달러 조달이 끊긴 상황에서 나라 전체가 외환보유액이라는 유일한 샘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사람들은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얼마나 썼는지 매일같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정부가 시장 개입에 나설 때마다 몇 십억 달러를 썼다는 계산이 바로 나온다. 정부가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다. 정부로선 지갑을 활짝 열어 보인 채 포커판에 끼어든 꼴이 됐다.


시장에선 '외환보유액의 역설(逆說)'이 생겨났다. 정부가 달러를 푸는 것이 호재인 동시에 악재다. 시장은 정부가 달러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것을 환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장의 환호'보다 '미래의 불안' 쪽이 강해지고 있다.


끝이 안 보이는 금융의 겨울, 정부는 장기전을 각오하는 게 좋겠다. 외환보유액을 틀어쥐면 환율이 뛰고 달러가 고갈돼 대단히 고통스러워진다. 하지만 환투기 세력과의 일전을 생각한다면 당장의 고통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참고 인내하고 아껴서, 이 불길한 혹한기를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입력 : 2008.10.02 21:51 / 수정 : 2008.10.03 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