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만의 지각 변동 행정구역개편 이뤄지나
청와대·국회·학계 한목소리로 개편 요구, 논의 급물살
- 행정구역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와 국회, 학계 모두 “행정구역개편”을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과거 선거구 개편 등을 염두에 두고 정략적으로 제기됐다 사그라진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개편 방향에 대해서는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여·야 모두 개편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이번에는 어떤 방향으로든 행정구역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쏟아져 나온 행정구역개편 방안의 대체적 골자는 기존 시ㆍ군ㆍ구를 통폐합해 통합시를 만들거나 아예 도를 통합해 연방을 만들자는 획기적인 것들로, 어느 쪽이 됐든 100여년간 골격을 유지해온 기존 행정체제의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물론 행정구역개편에는 지방자치단체의 반발 등 난관도 한둘이 아니다.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한 행정구역개편 논의를 제대로 알아본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자는 건가
“현행 3단계 체제에서 道를 없애고 2단계로”
민주당이 먼저 제기…이후 한나라가 주도권
행정구역개편의 핵심은 현행 ‘광역시·도’-‘시·군·구’-‘읍·면·동’ 3단계인 지방행정 체제에서 도를 실질적으로 없애 2단계로 재편하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특별시나 광역시 안에 있는 구를 없애거나 통폐합해 행정조직을 슬림화하자는 것이 행정구역개편의 요지다. 하지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서 제기된 이러한 방향에 대해 자유선진당과 학계 일부에서는 “오히려 도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자”며 광역 도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연방제를 제안, 논의는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는 양상이다. 현재까지 정부안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 현 정부 들어 행정구역개편 제의는 야당인 민주당에서 먼저 나왔다. 민주당은 지난 8월 28일 현행 행정체제를 개편해 전국의 도를 없애는 대신 70개 정도의 광역자치단체를 신설하자는 ‘지방행정체제 개편 특별법’ 제정을 추진키로 당론을 모았다. 이후 한나라당 내에서도 바로 공감의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8월 31일 허태열 최고위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행정체제개편”을 주장했고 임태희 정책위의장도 공감을 표시했다. 민주당은 ‘행정구역개편’, 한나라당은 ‘행정체제개편’으로 다소 상이한 용어를 사용했지만 바꾸자는 공감대가 급속도로 이뤄졌다.
이후 청와대도 행정개편을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월 9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현재 기초단위 행정구역은 100여년 전 갑오경장 때 개혁해서 만든 것”이라며 “경제권, 생활권, 행정서비스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금쯤은 행정개편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옛날같이 냇가나 강을 따라 만든 단위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여의도 정가 복귀가 점쳐지는 이재오 전(前) 의원도 최근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지금부터 정부는 50년, 100년 후의 우리나라 모습을 그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행정구역개편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이 전 의원은 김영삼 정부 당시인 1996년에 전국을 48개 자치단체로 개편하자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왜 바꾸자는 건가
“1896년 만든 현 체제로는 시대변화 감당 못해
전자정부 등장하면서 행정기관 역할도 축소돼”
현행 행정구역이 시대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근저에 있다. 현행 행정구역의 골격이 형성된 시점은 조선말기인 1896년(고종 33년)이다. 이때 주 교통수단은 도보와 우마차로 당시 만들어진 행정구역은 비행기, 고속전철, 자동차, 지하철 등으로 생활권이 넓어진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개편론자들의 주장이다. 실제 교통수단의 발달로 생활권과 행정권이 괴리되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나 고양시 일산구 주민 상당수가 자신들의 주소지가 있는 경기도가 아닌 서울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통신수단의 발달도 행정구역개편론에 힘을 싣고 있다.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한 전자민원처리가 보편화되면서 시민들은 시청이나 도청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초고속 인터넷을 통한 전자정부가 구현되면서 하위 행정기관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미(美) 브루킹스연구소가 전세계 198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8 세계전자정부 평가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만(2위)과 미국(3위)을 제치고 지난 2006년, 2007년에 이어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세계 최고의 전자정부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100년 전에 형성된 행정구역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바꾸면 무엇이 좋아지나
의사결정 단계 줄면서 신속한 정책 결정·시행 가능
지자체 통합으로 세금 낭비 줄고 대형사업 추진
의사결정 단계를 단축시킬 수 있다는 점이 행정구역개편의 장점으로 거론된다. 현행 ‘광역시·도’-‘시·군·구’-‘읍·면·동’ 3단계 행정시스템을 2단계인 ‘중앙정부’-‘광역시’ 체제로 재편하면 정책결정, 공장설립, 민원처리 등을 둘러싼 의사결정 과정을 3단계에서 2단계로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 라인이 줄어들면서 자치단체들이 사무처리를 하는 데 자체 완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 행정구역개편을 통해 지방의 열악한 재정여건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07년 군 지역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16.27%에 불과했다. 재정자립도가 가장 양호한 군도 50%에 못 미쳤다. 사정이 이런데도 인구 10만이 채 안 되는 군들이 공설운동장, 군민회관과 같은 공공시설을 앞다퉈 지으며 군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낭비와 비효율이 계속될 경우 인구가 적고 산업기반이 전무한 일부 지자체의 경우 열악한 재정여건으로 공무원 인건비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경기도 시장군수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김문원 의정부시장(한나라당)은 “예산이 지역별로 쪼개져 있어 큰 사업은 손도 못 대고 작은 문제만 덧칠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때문에 행정구역개편을 통해 지자체의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최막중 교수는 한 칼럼에서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칸막이 행정으로 일컬어지는 공공부문의 소이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며 “시군구별로 국토개발의 단위가 쪼개지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지 못한 소규모 유사한 도토리 키재기식 지역개발사업을 양산할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한 언론사에서 주최한 신국토포럼에 참석해 “시군구를 통폐합해 20개 정도의 지자체로 재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핵심 쟁점은 무엇인가
道를 살리냐, 죽이냐, 아니면 더 키우냐
각 당과 정치인 이해에 따라 주장 제각각
행정구역개편의 최대 쟁점은 현행 도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로 집중되고 있다. 도 폐지론자들은 통합시를 신설한 후 도를 폐지하면 경상도·전라도 등의 명칭도 사라져 지역감정이 완화될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현행법에 따르면, 도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떨어져 나와 별도 지자체로 독립할 경우 도는 자동으로 폐지된다. 시군구를 통폐합해 신설된 통합시가 도 인구의 3분의 2를 흡수할 경우 도가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도는 제주특별자치도를 포함해 모두 9곳이, 광역시는 6곳이 있다.
현 정부 들어 행정구역개편 방안을 처음 제기한 민주당도 그 핵심은 도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민주당 박병석 정책위의장(대전 서갑)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층화·복합화되어 있는 지방행정기구를 광역화·단순화 시키겠다”며 “조선 8도 체제는 조선 태종 때부터 시작돼 6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13도 체제도 110년이나 됐다. 교통 정보통신의 놀라운 발전이 있었는데 아직도 600년 전 제도를 쓰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현행 3단계 지방행정 구조를 2단계로 줄이면 막대한 예산을 절약할 수 있고 그 돈을 복지예산으로 돌릴 수 있다”고도 했다.
- ▲ 각 정당 대표들. / photo 조선일보 DB
- 물론 행정구역개편을 하더라도 도는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특히 도지사를 비롯한 광역자치단체장들은 향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달려 있는 문제여서 반대가 강하다. 지난 1995년 김영삼 정부 때도 시군 통합을 통해 광역시를 도입하면서 도까지 폐지하려 했지만 반발이 심해 실패했었다. 정우택 충북지사는 “지역마다 특성과 정체성이 있는데 일률적인 잣대로 짝짓기 하는 것은 주민반발을 불러올 것”이라며 도 폐지론에 반대했다. 김진선 강원지사 역시 “현재 도와 시군은 역사 문화 생활권이 오래전 형성됐다”며 “시군 통폐합으로 이 근간을 흔드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100년 이상 된 제도를 바꾸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회의론도 있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한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지난 100여년 동안 국가체제는 바뀌었지만 도는 이어져 왔다”며 “만년 도지사 하는 것도 아니고, 현장 모르고 하는 얘기인데, 전 세계 어느 나라에 도가 없느냐”고 반문했다. 김 지사는 “북한 공산주의에도 도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를 존속시키는 것을 넘어 오히려 도의 권한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충남 홍성예산)는 “지방조직을 단층화·슬림화해 효율을 높인다는 의도는 좋지만 국가 조직의 미래와 지방분권화 관점에서 시대적 요구와 미래의 국가 방향에 역행한다고 본다”며 “65~70개의 광역시 단위는 그 자체가 유수한 세계 기업을 유인하고 세계 시장을 뚫기에는 매우 작고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총재와 자유선진당은 전국을 70개 정도의 통합시로 재편할 경우 중앙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지방자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도를 통폐합해 전국을 4~5개 정도의 명실상부한 자치 연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 등 학계 일각에서도 전국을 500만~1500만 단위의 4~5개 광역단위(서울주, 경강주, 충전주, 경상주 등)로 재편하자는 자유선진당의 ‘광역 분권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광역 분권화’와 ‘강소국 연방제’안은 각 도주에 연방제 수준의 권한을 부여하자는 일본의 ‘도주제(道州制)’ 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 서울은 어떻게 |
25개 자치구를 5개로 통폐합
“특별시 유지하고 5개 통합구청장에게도 자치권 주자”
5~9개 독립시로의 분리안은 경쟁력 하락 우려로 철회
- 인구 1030만의 서울에 대해서는 특별시의 지위를 유지하되 25개 자치구를 5개의 통합자치구로 통폐합하자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행정체제개편 대표발의를 한 한나라당 권경석 의원(경남 창원갑)은 “서울의 25개 자치구를 인구 규모와 지리적 여건을 고려해 4~5개의 통합 자치구로 합치되 특별시의 지위는 유지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 경우 자치권을 갖는 통합 구청장 선거도 그대로 치르자는 것이다.
5개의 통합자치구로 개편할 경우 △중서울(종로구·중구·용산구·서대문구·마포구·은평구) △동서울(동대문구·성동구·중랑구·광진구·강동구) △서서울(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양천구·강서구) △남서울(강남구·서초구·송파구·동작구·관악구) △북서울(성북구·강북구·도봉구·노원구)로 나누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진행된 행정구역개편 논의에서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서울시를 5개의 독립시로 분할하자는 안을 들고 나왔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도 서울을 9개 독립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급진적 안을 들고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의 행정구역개편 논의에서는 서울시가 특별시 지위를 유지하고 자치구는 통폐합되지만 자치권은 그대로 유지하자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서울을 5~6개의 ‘독립시’로 분리하려던 방침에서 돌아선 것은 무엇보다 수도 서울의 경쟁력 문제를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행정구역개편에 원칙적 찬성 입장을 밝힌 오세훈 서울시장(한나라당)도 서울 분할안에 대해서는 “서울을 4~5개의 독립된 시로 쪼개면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시킨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잘 엮여 있어 인위적으로 행정구역을 분리하는 것이 오히려 경쟁력을 해칠 것”이라는 지적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특별시로 지정됐고, 관습헌법상으로도 확인된 600년 수도의 지위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