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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日), 해외 곡창 파고들어 곡물 쟁취

화이트보스 2009. 1. 1. 10:58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나라들] 일(日), 해외 곡창 파고들어 곡물 쟁취… '미시시피 사무라이'
[1] 곡물전쟁―'공포의 수집상' 젠노
美 현지 대량수집·저장·운송 갖춰… 곡물 메이저와 경쟁
'식량전쟁' 미리 대비 日 농지면적 2.6배의 해외기지 확보
뉴올리언스(미국)=김정훈 기자 runto@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식량 자급률로만 치면 일본(22.4%)이나 한국(27.2%)이나 마찬가지다. 매년 엄청난 양의 곡물을 외국에서 사 오는 것도 똑같다. 사료 원료 수입 부문에서 일본이 1위, 우리가 2위다.

다른 나라에 식량을 의존하는 현실은 같지만, 우리와 일본의 대응은 극과 극이다. 우리는 해외 곡물 메이저에 공급을 의존한다. 하지만 일본은 나라가 나서서 곡물 메이저를 키운다. 곡물 생산국에 직접 침투해 자체 곡물 수집망을 굴리고, 놀고 있는 땅을 개간해 수입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곡물대전(大戰)'이 발생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안상돈 농협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는 앉아서 곡물을 사 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일본은 해외에 나가서 쟁취해 온다"고 말했다. 쟁취의 비결을 미국 미시시피 강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시피의 사무라이

미시시피강 하구에서 250㎞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40m 높이의 거대한 곡물 사일로 60개가 줄지어 있다. 사일로 외벽에 새겨진 하얀색 커다란 글씨가 소유주를 알린다. 'ZEN-NOH(젠노)', 일본 회사다.
젠노 그레인 코퍼레이션(ZGC)은 우리나라의 농협중앙회와 유사한 조직인 일본의 젠노(全農)가 1979년 100% 출자해 만들었다. 직원은 80명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하는 일은 크다. 일본이 수입하는 옥수수의 30%인 를한 해 450만t 정도가 ZGC 통해 운송된다. ZGC의 역할은 미국 중부 평원의 곡물을 일본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이 사일로가 한 번에 저장할 수 있는 용량만 10만t이다. 유전자조작(GMO)을 하지 않은 곡물을 자동 선별해 실을 수 있을 뿐더러, 누가 생산했는지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일본의 대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옥수수밭에서 수출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회사도 1988년 사들였다. 젠노와 이토추(伊藤忠) 상사가 절반씩 돈을 댔다. 우리나라로 치면 미국 시장을 먹기 위해 농협중앙회와 대기업 한 곳이 공동 투자한 셈이다. 이 두 회사를 안정적으로 굴려 일본은 미시시피 곡물 유통 엘리베이터의 17% 정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일본 곡물전쟁의 첨병인 ZGC 본사 건물 입구를 들어서면 오다 노부나가의 번쩍이는 복제 갑옷이 방문객을 맞는다. 노부나가는 16세기 일본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무장(武將)이다. 5년 전 창립기념식 때 일본 젠노 본사(本社)가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풍 부채로 장식한 회의실, 후지산(山) 액자가 걸린 사무실. 회사의 겉모습은 영락없이 사무라이다. 하지만 ZGC의 현지화는 철저했다. 사장·부사장은 모두 미국인이고, 직원 80명 중 일본인은 4명에 불과했다. 1주일에 3~4번씩 일본 젠노와 진행하는 화상회의도 영어로 진행된다.

국적은 미국이지만 회사의 미국인들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일본 젠노(ZEN-NOH)의 거대한 곡물 저장탑(사일로). 40m 높이의 저장탑이 60개나 된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일본은 미국과 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의 곡창지대를 파고들어 식량을 구해오고 있다. /뉴올리언스=김정훈 기자 runto@chosun.com
일본, 자국 경지 면적 3배 확보

일본이 미국만 파고든 것은 아니다. 1970년대만 해도 불모지였던 브라질 북동부의 열대초원 지대 세라도가 브라질 전체 콩 생산량의 절반을 생산하게 된 것도 일본의 힘이다. 1973년 미국 정부는 콩 수출을 금지했고, 콩의 96%를 미국에서 수입하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위기는 기회가 됐다. 일본은 브라질 정부와 손잡고 세라도 농업 개발 협력사업을 시작했다. 설비·영농자금을 현지 농가에 빌려 주고 농업 전문가를 파견했다. 지금은 세라도 전체가 일본의 안정적인 콩 보급기지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세계 각지에 일본이 개발한 식량기지는 1200만㏊에 달한다. 자국 경지 면적(470만㏊)의 2.6배다. 일본의 해외 농업기지 진출은 농림수산성 산하 '해외농업개발협회'가 진두지휘하는 국가사업이다. 민간 기업이 식량기지를 물색할 때 초기 조사 비용의 절반을 대 준다. 생산된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 온다는 조건에서다. 식량기지 개발이 확정되면 상대 국가에서 수출제한을 못하도록 국가 간 양해각서도 체결한다.

일본의 성공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는 않았다. 1960년대 이토추·미쓰비시 등 일본의 종합 무역상사들은 인도네시아·호주 등에 해외농장을 힘들여 개척했다. 하지만 당시엔 저장·유통망을 장악한 다국적 곡물 메이저에 밀려 수확한 곡물을 일본으로 들여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은 농사뿐 아니라 농산물 유통 시장을 장악하는 데 민관(民官)이 힘을 합쳤다. 김한호 서울대 교수(농경제학)는 "일본 정부와 회사들은 단기수익이 아닌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 곡물전쟁에 대비했다"며 "우리는 몇 십 년을 뒤처져 있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elevator) 곡물을 '농장→강변(혹은 철도)→수출항→수출선박' 경로로 실어 나르는 시스템 하나하나를 부르는 말. 이 중 한 고리만 끊겨도 곡물 수입은 타격을 받게 된다. 미시시피강 주변 엘리베이터 시스템 중 17%는 일본이, 나머지는 카길·ADM 등 곡물 메이저가 장악하고 있다.

옥수수 지대(corn belt) 미국 옥수수의 70%가 생산되는 중부 대평원 6개 주(州) 지역. 미시시피강 주변을 끼고 있다. 이곳에서 자란 옥수수는 35~40일 동안 파나마 운하와 태평양 1만1000㎞를 건너 한우(韓牛) 사료가 된다.
입력 : 2009.01.01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