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옥헌
광주에서 북동쪽으로 국도를 따라 순천, 구례 방면으로 약 14km를 달리면 담양군 고서면의 고서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 곳으로 부터 약 2km를 더 가면 오른편에 산덕리의 후산리로 가는 길이 나 있는데 약 400m를 더 걸어가면 목적지인 ‘명옥헌(鳴玉軒)에 이르게 된다.
명옥헌(鳴玉軒)이란 갈색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는 후산마을 담벼락엔 유난히 인동초가 흐드러져 피었다.
400여년 전 한 선비의 올 곧은 사상을 전해주려는 듯, 진한 향기로 길손을 맞는 인동초 터널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명옥헌(鳴玉軒),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을 굴리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답게 한 여름의 배롱꽃이 승경(勝景)이라면, 눈 내리는 날 바라보는 경관은 마치 천상의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명옥헌(鳴玉軒)의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삼고’의 의미는 인조가 반정 직전 뜻을 규합하기 위해 세상을 돌때 이 곳 후산마을에 사는 명곡(明谷) 오희도(1583~1623)를, 유비가 제갈공명의 초가를 세 번 찾았듯이 그 또한 이렇게 찾아왔노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명옥헌의 또다른 이름으로 장계정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장계정은 명곡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이 그의 호를 장계(藏溪)라 칭하였던데서 유래하고 있다.
명옥헌의 여름은 그 풍성함에, 겨울은 소담하고 조용한 정취가 이방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다. 게다가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주변의 나무에 쌓인 눈꽃의 조화가 참으로 멋스럽다.
명옥헌은 전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로서 앞에는 연못이 있고 그 둘레엔 적송나무와 자미나무가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있다.
이 정자는 명곡 오희도가 살던 집터로서 그의 어머니 순천 박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작은 집을 짓고 망재(忘齋)라 했다.
오희도가 죽은 뒤 그의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헌(軒)을 짓고 명옥헌(鳴玉軒)이라 했다. 그후 퇴락되자 후손 오대성(1689~1761)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송강의 네째 아들)의 ‘명옥헌기(鳴玉軒記)’와 김재로(金在魯)의 ‘명옥헌 중수기’ 등이 있으며 관련 시문이 여럿 있다.
이 정자는 소쇄원과 더불어 조선 중엽 정원 조경연구의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 지내던 도장사의 터가 남아 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오면 마을 안쪽의 갈림길에‘후산리 은행나무’ 혹은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行)’이라 불리우는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세상을 주유(周遊)하면서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 온 말을 매둔 곳이라 해서 이런 명칭이 붙여졌으며, 현재 전남도 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됐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 고즈넉이 자리한 명옥헌은 아직 답사객들의 스포트 라이트를 덜받고 있지만 소쇄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민간 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지금은 한낱 조그만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는 산덕리 후산마을, 인조대왕의 발길이 서린 후산리 은행나무와 오희도의 생가 터인 명옥헌, 그리고 뒤편으로 수백년 수령의 노거수가 당시의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 박주하 화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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