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의 취가정
취가정은 광주시 북구 충효동 환벽리 입구의 높은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가 서게된 것은 이 마을 출신으로, 선조때의 명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호남의 혼을 말할 때 꼭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이가 곧 충장공인데, 그는 조선조 명종 22년인 1567년에 태어나 선조 29년인 1596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충장공은 어려서부터 기백과 담력이 뛰어났으며 소년시절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에게서 사사하고 우계 성 혼에게서도 수학했다.
25세가 되던 해에 임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담양에서 창의하여 전주까지 진군했는데 전란 중에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자, 형 덕홍은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김덕령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왜적들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알려졌을 만큼 대단했는데 당연히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 충청병사 이시언과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김덕령이 그들과 내통해 모반을 획책한다고 모함했다. 그로 인해 김덕령은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옥에서 억울하게 곤형(棍刑·몽둥이로 맞는 형벌)으로 세상을 뜨니, 덕령의 나이 채 서른을 넘지 못한 스물아홉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신원(伸寃)된 것은 현종 2년인 1661년으로, 당시 조정에서는 김덕령을 병조판서로 추증(追贈)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 때문이었을까.
선조 때의 시인 석주(石州) 권 필(1569~1612)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충장공 김덕령을 만나 서로의 시가를 교환하는 유명(幽明)의 감응(感應)이 있었다.
이때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나 그의 원혼을 호소하는 한 편의 시가를 읊었고, 석주가 이에 화답하는 한 수의 시를 지어 그의 원혼을 위로했다.
이들 두 사람이 서로 주고 받았다는 그 당시의 시를 읊어보면 매우 감격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술에 취해 부른 노래 어느 누가 들을 손가/ 꽃과 달을 즐겨함도 나의 소원 아니었네/ 높은 공을 수립함도 나의 바람 아니로다/ 공을 세운 그 업적도 구름처럼 사라지고/ 꽃과 달을 즐겨함도 쓸모없는 허사로다/ 술에 취해 부른 가곡 어느 누가 알아줄고/긴 칼 들고 일어서서 임금 은혜 갚으오리-
이 노래는 김덕령이 권필의 꿈속에 나타나 그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시가다.
-칼을 잡고 일어섰던 지난 옛날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였으나 운명인걸 어떠하리/ 한이 서린 그 영혼이 지하에서 통곡하며/ 마음속의 그 울분을 술에 취해 읊었도다-
권 필이 김덕령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화답시이다.
이들 두사람의 관계를 볼때 참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슬픈 마음을 자아내는 감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장면을 기리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고 또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이 노래를 읊은 ‘취시가(醉時歌)’라는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취가정(醉歌亭)’이라 한 것이다.
이 정자의 최초 창건은 그의 후손 난실 김만식(金晩植)과 여러 문족(門族)들이 협력해 고종 27년인 1890년에 이뤄져 문중 소유로 보전해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건물자체가 불에 타 없어지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의 후손 김희준(金熙駿)이 여러 족인(族人)들과 함께 1955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거실 1칸을 제외한 좌우양칸이 모두 마루로 꾸며져 있다.
이 정자가 서 있는 동산의 후면에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환벽당이 서 있고, 전면의 좌측방향에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의 식영정이 있으며 또 그의 정면에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의 독수정이 자리해 있다.
정내(亭內)에는‘취가정(醉歌亭)’이라는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보성출신의 한말 명필)의 대서(大書)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으며, 문헌공(文獻公) 송근수(宋近洙)의 정기(亭記)와 후손 김만식의 상량문, 효당 김문옥의 중건기를 비롯한 충장공, 석주의 취시가(醉時歌) 및 화답시 그리고 성문우천(聲聞于天), 충관일월(忠貫日月), 기장산하(氣壯山河), 취가어지(醉歌於地) 등이 4개의 기둥에 부착돼 있어 당시의 정취를 실감케하고 있다.
정자 앞 낙뢰로 허리가 꺾인 노송의 모습은 나라를 위해 우국충정을 다하다 억울하게 꺾인 충장공의 기개와 닮아 있는 듯해 찾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하고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메인 사진=의병장 김덕령의 못다 핀 의혼을 담은 취가정은 1950년 한국전쟁때 완전히 불타 소실됐으나 1955년 후손들이 원형을 그대로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브 사진=취가정은 충장공의 의로운 정신이 서려있어 광주학생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으로 그 맥을 이어온 이 땅의 절의정신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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