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22)=김인후와 필암서원(下)

화이트보스 2009. 1. 13. 11:43

▲김인후와 필암서원(下)

호남 인물로는 유일하게 문묘(文廟)에 배향돼 전라도의 자존심을 세운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하서는 당쟁과 사화로 혼탁한 시대를 살면서 비록 벼슬은 높지 않았지만 김안국(金安國)에게 수학하고 퇴계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인격을 닦아 훗날 조선의 큰 선비로 숭앙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도 신도비문에서‘우리나라의 인물 중에서 도학(道學)·절의(節義)·문장(文章)을 모두 갖춘 이는 그다시 찾아볼 수 없고 한 두가지에는 뛰어났는데, 하늘이 우리 동국을 도와 하서를 태어나게 하시어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게 하였다’라고 극찬했다.

또 율곡은 하서를 ‘청수부용(淸水芙蓉) 광풍제월(光風霽月)’에 비유했는데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반대한 율곡의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은 하서의 태극승음양(太極乘陰陽)이론과 일치해 하서가 앞서 주장했음을 알수 있고, 퇴계와 사칠론변(四七論辨)을 벌인 고봉도 하서에게 자주 문의했다.

하서는 인종에 대한 절의는 지극하여 비통한 심정을 주시(酒詩)로 달래며, 평생을 인종의 기일인 7월1일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일 통곡했다.

▲벼슬 버리고 고향서 제자배출

38세 봄, 성균관 전적(典籍)과 가을에 공조정랑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하고, 39세때 순창 쌍치에 들어가 초당(훈몽재)를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는데, 이때 송강 정철을 비롯 월계 조희문, 고암 양자징, 금강 기효련, 호암 변성온, 덕계 오 건, 고반 남언기, 진사 서태수, 죽헌 김재언, 청계 박원순 등이 그의 제자로 배출됐다.

40세 10월 부친 참봉공이 타계하여 12월 원당(願堂)에 장사지내고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 여막에 ‘담재(湛齎·하서의 또다른 호)’라고 쓴 액자를 걸어놓아 훗날 하서의 아호가 되기도 했다. 또 42세 9월 모친상을 당하여 고묘(考墓)와 나란히 장사 지냈다.

44세(명종 8) 7월 문정왕후의 수렴정정이 끝난 직후 홍문관 교리와 45세 9월 성균관 직강에 제수(除授·임금이 직접 내리는 벼슬)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길렀다.

이 무렵 지어진 시가 그 유명한 ‘자연가’다.

또 기대승과 태극도설 및 4단7정에 대하여 담론하고 이 항에게 태극 음양에 대한 오해를 깨우쳐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 나흠순의 도심설(道心說)을 비판, 퇴계와 고봉도 그 의견을 따랐다.

그러나 그동안 상심으로 건강이 쇠약해져 51세(명종 15)에 타계하니, 14세때 취한 여흥 윤씨(윤림형 군수의 딸)와의 사이에 2남4녀를 두었다.

▲필암서원 창건 배경

하사의 문묘종향을 처음으로 소청한 것은 영조 47년(1771)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 등이 건의, 정조 10년(1786) 4월4일 좌부승지 박천행(朴天行)을 파견하여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으로 제를 지낸 후 줄기차게 추진됐다.

그해 8월부터 정조 14년까지 8도 유생들이 계속해서 하서의 배향을 주청했으나 정조대왕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중하고 정중하게 다루기 위하여’라는 이유로 불윤(不允)했다.

그후 정조 20년, 유생들이 조 헌, 김인후, 김 집을 문묘 종향하자는 상소가 있었는데 하서의 이름이 첫번째 거론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불윤됐다.

여러차례 유생들의 건의가 결국 정조 20년 9월 하서가 종묘에 배양되기에 이르렀다.

▲필암서원 보관 유물

1590년에 창건된 필암서원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됐으나 1624년 복원, 1662년(현종3) 지방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필암(筆巖)’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됐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 그의 사위이자 제자인 양자징을 추가 배향했다.

특히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사원철폐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 신문(神門), 장서각, 경장각, 진덕재, 청절당, 장판각, 행랑, 홍살문, 하마석 등이 있다.

사우 중앙에는 하서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형례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보관돼 있고,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재·서재로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장판각에는 ‘하서집’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 돼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1천300여권의 책과 보물 제587호인 ‘노비보(奴婢譜) 이외에 문서 69점이 소장돼 있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 조선 당대의 지조있는 선비의 큰 기침이 금방이라도 울릴것만 같은 필암서원 홍살문을 뒤로 하고 나오는 길가엔 이름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마치 하서가 정신이 부활이라도 한 듯….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