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보의 풍암정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도 서러워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춤추며 울었지
아! 당신은 찔레꽃.
초 여름 풍암정 가는 길엔 하얀 찔레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짙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온 몸으로 노래하는 장사익이란 가수의 노래‘찔레꽃’을 읊조리며 원효계곡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풍암정을 찾았다.
찔레꽃 향기로 사방을 뒤덮힌 풍암정의 주인은 충장공 김덕령의 동생인 풍암(楓岩) 김덕보(金德普·1571~1621)다.
풍암정은 이 고장 출신의 명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아우 풍암(楓岩) 김덕보(金德普)에 의해 지어진 정자다.
선조 25년인 1592년의 임진왜란은 김덕보의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천추(千秋)의 원한을 남기었다.
그의 장형인 김덕홍(金悳弘)이 의병으로 제봉 고경명의 뒤를 따라 금산에서 순절하였고, 그의 중형인 김덕령도 의병장으로 많은 공훈을 세웠음에도 간신배들의 참소에 의해 억울한 옥사(獄死)를 당하는 등 한많은 격변을 당했다.
이러한 일들을 애통하게 여긴 그가 그 당시의 세상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졌을리 없다.
이때문에 풍암은 세상 일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곳 무등산 원효계곡을 찾아 터를 잡고 도학과 경륜을 쌓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송강의 네째 아들 기와산인(畸窩散人)이 기록한‘풍암기(楓岩記)’를 살펴보면, 당시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주 은밀한 명승지로 소개됐다.
그 내용에 따르면 “무등산의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이곳을 따를만한 곳이 없다”라고 했고, 또 이곳의 이름을 ‘풍암(楓岩)’이라 한 그 원인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기암괴석의 사이마다 100여주의 단풍나무가 끼여 있어 흐르는 시내의 물빛이 붉을 정도로 무성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정자에 대해 말하기를“이제 새로 지은 정자이기 때문에 아직 그의 명칭이 붙지 않았다”라고 했고, 또 이 정자의 주인 김덕보를 평하여 말하기를“그의 자(子)를 자룡(子龍)이라 한 광주인으로 초시 때부터 속세를 떠나 이곳에 노닐면서 마음의 근심을 씻어 없애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때 그의 사람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료들로 봐서도 그 당시 이 지역 경치가 어떠 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그 이름을 풍암(楓岩)이라 하였고, 또 이 정자가 어느 해에 지어졌으며 주인 김덕보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여러 문제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정자의 창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정자의 창건을 임진왜란으로 보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볼 때 임진왜란이 아닌 이후가 분명하다.
그 단적인 예로 만력(萬曆) 갑인년(甲寅年)인 1614년도의‘풍암기(楓岩記)’라는 기문에 ‘이신복책미유명칭(以新卜策未有名稱)’이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풍암정의 구조는 도리 석초(石礎),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되어있고, 중앙의 거실 1칸을 제외한 좌우양간이 판자마루다.
기묘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기암괴석과 수십 그루의 노송, 그리고 각종 야생화가 사방으로 둘러 있으며, 원효계곡의 맑은 청류(淸流)가 앞으로 흐르고 있어 천하일품의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현재 광주시 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된 이 정자는‘풍암정’이라는 대서(大書) 현판이 걸려다. 정면에는 안우산, 임석천, 고제봉, 기와산인 등의 판각시문이 걸려있어 당시의 경관을 엿볼 수 있으며 보전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다.
또 이 정자는 풍암정사(楓岩精舍)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는데, 정홍명이 쓴 ‘풍암정기(楓岩亭記), 그리고 지역 출신 사림들의 시문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름 있는 시인묵객들이 이곳 명승지에 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정자 앞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과 큼직 큼직한 바위들, 계곡 쪽으로 지붕을 덮은 듯 기울어져 자란 커다란 소나무들, 그 사이에 자그만한 정자가 꼭 그림에 그린 듯이 가분하게 서 있어 마치 윤선도의‘오우가(五友哥)’를 연상케 하고 있다.
정자 앞의 커다란 바위 모서리에는 ‘풍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심산유곡 서너평의 정자 안에서 형들의 비통함을 가슴 움켜쥐며 곱씹었을 김덕보의 마음을 전하려는 듯 사방에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 박주하 화백
박주하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도 서러워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춤추며 울었지
아! 당신은 찔레꽃.
초 여름 풍암정 가는 길엔 하얀 찔레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짙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온 몸으로 노래하는 장사익이란 가수의 노래‘찔레꽃’을 읊조리며 원효계곡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풍암정을 찾았다.
찔레꽃 향기로 사방을 뒤덮힌 풍암정의 주인은 충장공 김덕령의 동생인 풍암(楓岩) 김덕보(金德普·1571~1621)다.
풍암정은 이 고장 출신의 명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아우 풍암(楓岩) 김덕보(金德普)에 의해 지어진 정자다.
선조 25년인 1592년의 임진왜란은 김덕보의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천추(千秋)의 원한을 남기었다.
그의 장형인 김덕홍(金悳弘)이 의병으로 제봉 고경명의 뒤를 따라 금산에서 순절하였고, 그의 중형인 김덕령도 의병장으로 많은 공훈을 세웠음에도 간신배들의 참소에 의해 억울한 옥사(獄死)를 당하는 등 한많은 격변을 당했다.
이러한 일들을 애통하게 여긴 그가 그 당시의 세상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졌을리 없다.
이때문에 풍암은 세상 일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곳 무등산 원효계곡을 찾아 터를 잡고 도학과 경륜을 쌓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송강의 네째 아들 기와산인(畸窩散人)이 기록한‘풍암기(楓岩記)’를 살펴보면, 당시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주 은밀한 명승지로 소개됐다.
그 내용에 따르면 “무등산의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이곳을 따를만한 곳이 없다”라고 했고, 또 이곳의 이름을 ‘풍암(楓岩)’이라 한 그 원인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기암괴석의 사이마다 100여주의 단풍나무가 끼여 있어 흐르는 시내의 물빛이 붉을 정도로 무성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정자에 대해 말하기를“이제 새로 지은 정자이기 때문에 아직 그의 명칭이 붙지 않았다”라고 했고, 또 이 정자의 주인 김덕보를 평하여 말하기를“그의 자(子)를 자룡(子龍)이라 한 광주인으로 초시 때부터 속세를 떠나 이곳에 노닐면서 마음의 근심을 씻어 없애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때 그의 사람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료들로 봐서도 그 당시 이 지역 경치가 어떠 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그 이름을 풍암(楓岩)이라 하였고, 또 이 정자가 어느 해에 지어졌으며 주인 김덕보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여러 문제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정자의 창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정자의 창건을 임진왜란으로 보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볼 때 임진왜란이 아닌 이후가 분명하다.
그 단적인 예로 만력(萬曆) 갑인년(甲寅年)인 1614년도의‘풍암기(楓岩記)’라는 기문에 ‘이신복책미유명칭(以新卜策未有名稱)’이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풍암정의 구조는 도리 석초(石礎),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되어있고, 중앙의 거실 1칸을 제외한 좌우양간이 판자마루다.
기묘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기암괴석과 수십 그루의 노송, 그리고 각종 야생화가 사방으로 둘러 있으며, 원효계곡의 맑은 청류(淸流)가 앞으로 흐르고 있어 천하일품의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현재 광주시 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된 이 정자는‘풍암정’이라는 대서(大書) 현판이 걸려다. 정면에는 안우산, 임석천, 고제봉, 기와산인 등의 판각시문이 걸려있어 당시의 경관을 엿볼 수 있으며 보전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다.
또 이 정자는 풍암정사(楓岩精舍)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는데, 정홍명이 쓴 ‘풍암정기(楓岩亭記), 그리고 지역 출신 사림들의 시문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름 있는 시인묵객들이 이곳 명승지에 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정자 앞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과 큼직 큼직한 바위들, 계곡 쪽으로 지붕을 덮은 듯 기울어져 자란 커다란 소나무들, 그 사이에 자그만한 정자가 꼭 그림에 그린 듯이 가분하게 서 있어 마치 윤선도의‘오우가(五友哥)’를 연상케 하고 있다.
정자 앞의 커다란 바위 모서리에는 ‘풍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심산유곡 서너평의 정자 안에서 형들의 비통함을 가슴 움켜쥐며 곱씹었을 김덕보의 마음을 전하려는 듯 사방에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 박주하 화백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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