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21)=김인후와 필암서원(中)

화이트보스 2009. 1. 13. 11:41

▲김인후의 필암서원(中)
장성에는 여느 지역과는 달리 유독 서원·사우가 많다. 원래 이 지역에는 26개의 서원과 사우가 있었는데,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됐으나 필암서원만 남아 장성의 선비문화를 지금까지 대변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다. 이 서원은 호남의 장보(章甫)의 발론으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의 학덕을 숭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선조 23년(1590) 세워졌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 됐다가 인조 2년(1624) 황룡면 필암리 증산동에 다시 건립됐다. 그후 1662년 국가로 부터 ‘필암(筆岩)’이라는 사액을 받아 남도 유일의 사액서원으로 김인후와 그의 사위 고암 양자징을 모신 곳이다.
필암서원에는 정조대왕의 어필 현판과 송시열의 현판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또 보물 제58호로 지정된 각종 서원 자료들인 노비보(奴婢譜), 원장선생안(院長先生案), 집강안(執綱案) 등과 인종이 하서에게 하사했다는 묵죽, 하서유묵 등 60여건의 자료가 남아있다.
▲강직한 조선의 큰 선비
하서는 18세때 화순 동복에 귀양가 있는 성리학자 최산두를 찾아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또 화순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광산에 있던 박 상의 언행에 감복, 바로 그런 선비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19세에 과거에 응시해 장원이 된 후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에 젖어 성리철학을 계속 잇지 못한다.
조정에 나아가 홍문관의 기사관으로 승진한 후 하서는 세자(인종)의 공부를 돌보던 1543년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20년째 되던 해였지만, 그때 희생된 정암 조광조 등 사림들의 명예회복을 아무도 거론치 못했다.
마침 동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자 이것을 기화로 하서는 왕에게 군자의 도를 진언한다.

-“예로부터 선치(善治)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이런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터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그러나 중종이 이 상소를 흔쾌히 윤허(允許)하지 않자 하서는 부모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 옥과현감으로 임명돼 내려왔다.
▲송강도 하서의 인품에 감동
그해 가을 하서는 인종이 갑자기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인종의 기일에는 종일 산속에 들어가 통곡하자, 당시 그의 문하생으로 공부하고 있던 송강 정 철이 감동하여 시를 지었다.

-갈대꽃 핀 곳에 저녁 노을 비껴띄고
삼삼오오 뒤섞여 노는 저 백구야
우리도 강호로 뛰돌아 다니며
舊盟을 찾아 볼까 하노라.
-백구가-

하서는 인종 승하 후 성균관 전서 등에 임명 되지만 관직을 사양하고 순창으로 내려와 초당을 짓고 그동안 손을 끊었던 성리철학에 매진했다.
그때 하서는 인종의 죽음과 을사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좌절감과 실의에 심신이 지쳐 있었지만, 해남 선비 유희춘과의 서신에서 “자질이 낮은데다 게을러서 힘써 공부하지 못하고 한갓 흠모만 하고 말았다”고 토로하고 마음을 다듬어 공부에 매진해 마침내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 냈다.
▲하서 독자적 학통 일궈
후대에 하서를 연구한 이들은 그의 철학이 학통의 연연과 관계없이 ‘독자적’이며‘한국의 성리철학을 실천면에서 이론 연구로 방향 전환하게 한 선구자’라고 진단, 호남 성리철학의 시조라고 명명하고 있다.
황룡강은 그의 깊은 얘기를 간직한듯 하서가 한 말을 이렇게 건네준다.
“일찍이 옛 것을 공부하는 것이‘오늘’의 일을 경험하는 것만 못하고, 책을 상고하는 것이 ‘산사람’을 보는 것만 못하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지껄임 무슨 힘되랴
밝은 달은 본디 무심한 것을
높고 낮음은 지세를 따른거고
이르고 늦음은 천시로부터 일세
사람들 지껄임을 걱정할게 뭐람
명월은 본시 사심이 없는 것을.
이 시는 하서가 여섯살 때 지었다는 ‘望月詩’다.

장성 황룡강에 내려앉은 16세기 달빛 본성을 꿰뚫은 이 소년이 살았던 시대는 왜 그리 비참했을까.
맑고 고운 정신이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 소년은 뒤곁 대나무 숲에 들어가 하루종일 퍽퍽 울었을 것이다. 인재에게 울분의 한을 심어줬던 역사. 하서는 오늘 호남 땅에서 그 불씨를 줍고 있을 지도 모른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메인사진=필암서원은 1590년 하서 김인후를 따르던 문인들과 호남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호남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서브사진=하서는 인종 승하 후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초막을 짓고 성리학에 매진, 호남 성리철학의 텃밭을 일궈냈다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