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7)=송강정(中)

화이트보스 2009. 1. 13. 11:35

◇송강정(中)
송강이 생존·활동했던 16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체제 확립과 문물의 창조·정비 등이 크게 한 단락 지어지고, 바야흐로 또 다른 변화와 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다방면에 걸쳐 제기된 시기다.
▲동서파쟁 한복판서 시련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른바 사림(士林)이라는 사회 세력이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여,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러 기존의 훈구·척신(勳舊戚臣)세력을 밀어내고 집권 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송강은 이러한 역사 현실의 일선에서 대부분의 사태를 직접 체험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타고난 성격이 범상치 않았던데다 역사 격변기를 살았던 만큼 파란만장한 삶, 바로 그 것이었다.
송강은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그 뜻을 추호도 굽히지 않았다. 민본(民本)과 훈민(訓民)을 위정 이념으로 한 왕조시대를 살면서, 그 자신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는 경국제민의 뜻을 타고난 기질에 충실하여 펴 나갔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자초하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랬듯이 송강은 당쟁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거침없이 밀고 나간 정치가였는가 하면,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들을 창작해 낸 문인이었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풍류인이요, 타고난 재인이었다.
▲김윤제와 운명적인 만남
송강의 나이 16세 되던 1551년(명종 6년),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훗날 선조임금)가 태어난다. 이 왕자의 탄생의 은사(恩赦)로 드디어 송강의 아버지 참판공은 7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오늘날 국경일이나 나라 전체에 획기적 전환의 계기가 마련될 때, 위정자가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유배에서 풀려난 참판공은 가족을 이끌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따라 창평으로 내려온 송강은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약 10년간을 이곳에서 생활했다.
지리한 고통과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년의 성장기를 바로 이곳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송강에게 있어서 담양 창평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자,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다.
송강의 새로운 인생은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본격적인 배움의 길이 열리고, 배필을 만나 성인의 예를 올리는가 하면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얻게 됐기 때문이다.
송강이 김윤제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게 된 내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소년 송강과 자미탄
송강이 창평에 살고 있던 어느 여름 날, 둘째 형 소(沼)를 만나러 어머니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의 둘째 형은 일찍이 과거를 준비하던 중,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길에 통분과 환멸을 느껴 이를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내려가 그곳에 깃들어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순천으로 가려면 반드시 성산(星山)을 거쳐야만 했다. 너무도 더운 여름 날이라서 송강은 성산 앞을 지나는 길에 개울(자미탄·紫薇灘)에 들어가 멱을 감았다.
이 무렵 사촌 김윤제는 벼슬을 잠시 그만두고 성산 맞은편 작은 구릉에 환벽당을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여름 날 졸음에 겨워 잠시 눈을 붙이노라니, 앞 개울에서 한 마리 용이 이리저리 노니는 꿈을 꿨다. 너무도 생생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자미탄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는 소년이 눈에 띄었다. 한 눈에 비범한 기골을 알아본 그는 소년을 불러 여러가지 문답을 해보았다. 참으로 영특했다. 그리하여 그는 송강의 순천 행을 만류시키고 자기 문하에 두고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창평의 규수와 결혼
이렇듯 송강과 김윤제의 만남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극적이다.
또 마침 김윤제의 종질(사촌 형제의 아들)인 서하 김성원도 거기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이어서, 송강은 그와 동문수학의 인연을 맺게 된다. 운명적인 만남에 이은 인연의 고리는 이렇게 송강이라는 인물의 행로를 서서히 틀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송강은 17세 되던 1552년, 창평의 문화류씨(文化柳氏)에게 장가든다. 류씨 집안은 고려왕조 때 태사(太師) 벼슬을 한 류차달(柳車達)의 후손 류강항(柳强項)의 딸로서, 김윤제의 외손녀다.
송강의 혼사를 김윤제가 적극 주선했을 것은 물론이다. 그로 인해 김윤제는 송강의 처외숙이 되고, 김성원은 처외당숙이 된다.
송강의 결혼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는 특별히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지만, 자신의 외손녀를 송강에게 시집 보낸 김윤제는 그다지 넉넉할 리 없는 송강에게 재산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로인해 송강은 경제적으로도 다소 여유를 갖게됐다. 송강이 큰 인물로 발돋움 한데는 김윤제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었던 것이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 박주하 화백

메인사진=송강은 당쟁으로 말미암아 관직을 버리고 담양으로 내려와 이곳에 정자를 짓고‘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지어 국문학사에 또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서브사진=정자를 떠받치고 있는 굵은 기둥은 송강의 기개를 말해주듯 지금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간간히 찾는 길손을 맞고 있다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