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 임억령(林億齡·1496~1568)의 식영정(息影亭)은 우선 ‘식영정 20영(息影亭 二十詠)’과 여기에 차운한 면앙정 송 순, 제봉 고경명, 송강 정 철, 서하당 김성원 등이 쓴 20영(二十詠)이 송강 정 철의 전원가사 및 충신연주가사의 백미인 성산별곡을 낳게한 산실이다.
뿐만 아니라 석천은 이 정자에서 당대 거유(巨儒)였던 퇴계 이 황, 율곡 이 이 등과 교유하였음은 물론 호남의 대 문장가요, 큰 선비인 면앙정과 함께 송강, 제봉, 서하당, 고봉 등에게 강학(講學)·강시(講詩)함으로써 훗날 호남시학의 찬란한 지평을 열었다.
또한 사촌 김윤제, 양산보, 송익필 등도 석천을 흠모하여 이 곳을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시문으로 화답하였다. 이런 식영정이 오늘날 주변 경관이 크게 훼손되고 이정표 마져 바르지 못해 이 곳을 찾는 손객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식영정 주변경관 훼손
식영정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도로변에 자리한 덕에 매일같이 길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정자 주변에는 옛 선비들의 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광경들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어 안타깝다.
무엇보다 식영정 입구에는 수출 100억불 기념탑 모양의‘송강 정 철 가사의 터’가 눈에 거슬린다.
이 탑을 보는 순간 송강 정 철의 훌륭한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보다 대리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정이 앞서 고고한 가사문화권의 정취가 순식간에 깨져버림을 느낄수 있다.
지난 91년에 세워진 이 탑의 비문을 보자.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 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 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포기 흙 한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옴 몸으로 읽는다.
누가 보아도 참 좋은 말 들이다.
그러나 푸른 글씨가 된다는 냇물은 인근의 유흥음식점에서 흘러 보낸 폐수로 넘실대고 있으며, 식영정 마루턱의 운율같은 바람은 ‘개발 바람’으로 굴착기 소리가 온종일 끊이질 않고 있다.
아무튼 탑에 가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뒤편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부용당(芙蓉堂)이란 누정과 오른편으로 서하당이 자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부용당(芙蓉堂)은 연꽃이 있는 연못이다. 현재 이 곳에는 연꽃은 커녕 제대로 된 수로(水路)하나 없어 많은 비가 내릴땐 이 일대가 범람하기 일쑤다.
▲식영정, 석천 유적지로 재편돼야
이 건물의 주인 석천 임억령은 식영정에 65세에 들어와 73세 때 해남 집으로 돌아가 운명할 때까지 8년을 이 곳에 은거하면서 성산동(식영정이 자리한 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일상을 시로 그렸다.
그가 성산에서 지은 400여수의 시 가운데 ‘식영정 20영’(息影亭 二十詠)은 식영정에서의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식영정 20영’은 주변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형상화한 연작시로 이 지역 시단의 상징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송강의 성산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석천이 ‘식영정 20영’을 짓자 면앙정 송 순이 화답하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 철이 차운(그 시의 제목과 운율을 빌려옴)을 하게 된 것이다. 식영정에 걸려있는 싯귀들이 그것이다.
‘식영정 20영’에서 보듯 식영정에서 바라본 외부의 경관을 시간과 계절을 두고 읊었음을 알수 있다.
같은 시제를 두고 다섯 사람들이 지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 국문학사에서 한글로 쓰여진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는 송강 정 철의 ‘성산별곡’이 이를 소재로 하여 쓰여졌음은 새겨 볼 대목이다.
현재 식영정을 비롯 그 주변은 400여수의 시를 지은 석천 임억령의 행적은 찾아볼 길 없고 ‘성산별곡’한 수를 남긴 송강 정 철은 가사문학 비를 비롯해 인근 송강정과 함께‘송강 유적지’로 명명하고 있다.
지난 72년 전남도는 이 일대를 송강유적지로 묶은 것이다.
여기에는 송강 후손들의‘선조 업적기리기’작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행정 관청의 주먹구구식의 행정은 훗날 석천 후손과 송강 후손들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해하기 힘든 안내표지판
그 뿐이 아니다. 이곳을 찾는 손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식영정을 안내하는 표지판 또한 가관이다.
이 안내문에는 ‘송강의 성산별곡은 식영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별뫼의 자연경관에 취해 지어진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별뫼(성산)는 식영정 뒷편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부분들이다. 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길손들은 이곳 식영정 주인을 송강 정철로 혼돈하고 있다.
모든 자료는 석천 임억령의 행적보다 송강 정 철의 행적을 더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착각은 이미 예견된 것이다.
물론 국문학사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송강의 ‘성산별곡’으로 인해 석천의 식영정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식영정을 찾는 길손만이라도 석천 임억령에 대한 사상을 한번쯤 더듬어 보는 것도 순례자의 도리일 것이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글·그림/박주하 화백
박주하
뿐만 아니라 석천은 이 정자에서 당대 거유(巨儒)였던 퇴계 이 황, 율곡 이 이 등과 교유하였음은 물론 호남의 대 문장가요, 큰 선비인 면앙정과 함께 송강, 제봉, 서하당, 고봉 등에게 강학(講學)·강시(講詩)함으로써 훗날 호남시학의 찬란한 지평을 열었다.
또한 사촌 김윤제, 양산보, 송익필 등도 석천을 흠모하여 이 곳을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시문으로 화답하였다. 이런 식영정이 오늘날 주변 경관이 크게 훼손되고 이정표 마져 바르지 못해 이 곳을 찾는 손객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식영정 주변경관 훼손
식영정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도로변에 자리한 덕에 매일같이 길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정자 주변에는 옛 선비들의 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광경들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어 안타깝다.
무엇보다 식영정 입구에는 수출 100억불 기념탑 모양의‘송강 정 철 가사의 터’가 눈에 거슬린다.
이 탑을 보는 순간 송강 정 철의 훌륭한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보다 대리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정이 앞서 고고한 가사문화권의 정취가 순식간에 깨져버림을 느낄수 있다.
지난 91년에 세워진 이 탑의 비문을 보자.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 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 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포기 흙 한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옴 몸으로 읽는다.
누가 보아도 참 좋은 말 들이다.
그러나 푸른 글씨가 된다는 냇물은 인근의 유흥음식점에서 흘러 보낸 폐수로 넘실대고 있으며, 식영정 마루턱의 운율같은 바람은 ‘개발 바람’으로 굴착기 소리가 온종일 끊이질 않고 있다.
아무튼 탑에 가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뒤편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부용당(芙蓉堂)이란 누정과 오른편으로 서하당이 자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부용당(芙蓉堂)은 연꽃이 있는 연못이다. 현재 이 곳에는 연꽃은 커녕 제대로 된 수로(水路)하나 없어 많은 비가 내릴땐 이 일대가 범람하기 일쑤다.
▲식영정, 석천 유적지로 재편돼야
이 건물의 주인 석천 임억령은 식영정에 65세에 들어와 73세 때 해남 집으로 돌아가 운명할 때까지 8년을 이 곳에 은거하면서 성산동(식영정이 자리한 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일상을 시로 그렸다.
그가 성산에서 지은 400여수의 시 가운데 ‘식영정 20영’(息影亭 二十詠)은 식영정에서의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식영정 20영’은 주변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형상화한 연작시로 이 지역 시단의 상징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송강의 성산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석천이 ‘식영정 20영’을 짓자 면앙정 송 순이 화답하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 철이 차운(그 시의 제목과 운율을 빌려옴)을 하게 된 것이다. 식영정에 걸려있는 싯귀들이 그것이다.
‘식영정 20영’에서 보듯 식영정에서 바라본 외부의 경관을 시간과 계절을 두고 읊었음을 알수 있다.
같은 시제를 두고 다섯 사람들이 지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 국문학사에서 한글로 쓰여진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는 송강 정 철의 ‘성산별곡’이 이를 소재로 하여 쓰여졌음은 새겨 볼 대목이다.
현재 식영정을 비롯 그 주변은 400여수의 시를 지은 석천 임억령의 행적은 찾아볼 길 없고 ‘성산별곡’한 수를 남긴 송강 정 철은 가사문학 비를 비롯해 인근 송강정과 함께‘송강 유적지’로 명명하고 있다.
지난 72년 전남도는 이 일대를 송강유적지로 묶은 것이다.
여기에는 송강 후손들의‘선조 업적기리기’작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행정 관청의 주먹구구식의 행정은 훗날 석천 후손과 송강 후손들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해하기 힘든 안내표지판
그 뿐이 아니다. 이곳을 찾는 손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식영정을 안내하는 표지판 또한 가관이다.
이 안내문에는 ‘송강의 성산별곡은 식영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별뫼의 자연경관에 취해 지어진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별뫼(성산)는 식영정 뒷편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부분들이다. 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길손들은 이곳 식영정 주인을 송강 정철로 혼돈하고 있다.
모든 자료는 석천 임억령의 행적보다 송강 정 철의 행적을 더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착각은 이미 예견된 것이다.
물론 국문학사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송강의 ‘성산별곡’으로 인해 석천의 식영정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식영정을 찾는 길손만이라도 석천 임억령에 대한 사상을 한번쯤 더듬어 보는 것도 순례자의 도리일 것이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글·그림/박주하 화백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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