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1)=환벽당과 김윤제

화이트보스 2009. 1. 13. 11:29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1)=환벽당과 김윤제
광주호의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위에 자리잡은 정자 하나가 솔 숲에 묻혀 오가는 객들을 맞고 있다.
이 곳이 바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1501~1572)가 건립한 환벽당이다.
키낮은 쪽문으로 머리를 구부리고 이끼 낀 수십 계단을 올라 숨을 고르면 눈앞에 펼쳐진 정경이 참으로 정겹다.
환벽당은 사촌이 소년 정 철을 만나 공부를 가르친 곳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곳이기에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의 흔적을 좇는 이들이 많다.

▲환벽당과 조대(釣臺)
-소나무들이 참으로 의젓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시비(詩碑)는 그 풍채를 거대한 공룡처럼 펼치고 있다. 짝 맞는 늙은 솔란 조대(釣臺)에 세여두고….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송강 정 철의 성산별곡의 일부이다.
그 시비 아래로 내려가 보면 바위가 듬직하게 둘러져 있다. 앉아서 낚시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조대(釣臺)라고 이름 하였고 그 바위의 전면에는 ‘조대’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는 지수석(止水石)이란 글이 패여있다. 꽤 잘 쓰여진 글씨다. 누가 거기에 글을 새겨 두었는지 모르지만 물이 잠시 멈추었다 가는 곳이란 의미가, 지금 광주호가 그 자리에 들어설 것을 미리 예견한 글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바로 아래 지척에 움푹 파인 곳이 보인다. 이 곳이 용소(龍沼)라고 불리는 곳이다.
듣기만 하여도 무언가 전설이 나올법한 이름이다. 여기에서도 아주 상서로운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전설을 더듬어 보자.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환벽당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자신의 집 바로 아래 냇가에서 한마리의 용(龍)이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됐다.
기이하게 여긴 사촌은 하인에게 냇가에 가보라고 일렀다. 하인이 하는 말이 웬 청년이 목욕을 하고 있음을 알리자 , 사촌은 즉시 그 청년을 데려 오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송강 정 철이다.

▲예사롭지 않은 만남의 인연
송강은 사촌의 휘하에서 10년을 넘게 공부하게 됐고, 27세에 이르러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해 관계로 진출했다. 이런 기이한 인연 탓에 송강은 사촌의 외손녀와 결혼을 하고 사촌 이외에도 이 무등산 자락에서 교유했던 석천 임억령, 면앙정 송 순,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등과 같은 명현들에게서 수학을 했던 것이다.
그 옛날의 푸르름이야 이제는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뜰망질을 하던 청년 한명이 금방이라도 물에서 얼굴을 씻고 올라 올 것 같은 상상이 든다.
더불어 사촌의 제자로는 이런 송강 말고도 광주의 의병장 김덕령이 또한 있으니, 과연 명소 중의 명소이며 사촌의 인품을 가히 짐작 할수 있는 일이다.
이제 흐르는 물을 뒤로하고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환벽당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주변에는 맥문동이 푸르게 둘러싸여 있고, 그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상사화(석곡이라고도 하는 이 식물의 잎은 4월이면 줄기가 올라오고 6월이면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9월이 되면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운다)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눈을 위로 돌리면 아주 오래된 모과나무가 한잔의 술을 기억하게끔 덩실 메달려 있음도 볼수 있다.

▲환벽당 건립연대 분분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정자 치고는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는 환벽당은 을사사화(1545)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나주 목사에서 퇴직하면서 지었다는 학설이 분분해 지금으로써 그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는 광주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환벽당은 주변이 모두 푸르름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집 이름의 깊은 속내야 어디 푸르름으로만 해석할 수 있겠는가.
환벽당의 제액은 우암 송시열이 쓴 글로써 강건함이 배어 있으며 벽에 걸려 있는 석천 임억령의 시는 과거의 환벽당과 주변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석양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모래 길에 대밭가마/ 소리쳐 우네.

▲사라진‘벽당간’찾을길 없어
환벽당의 공간은 비단 지금의 건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건물 아래의 널찍한 정원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쇄원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에도 지금은 쇠락했지만 조그마한 연못이 그 옛날 수 많은 시인들의 눈길을 받았을 법하게 자리하고 있다.
건립연대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설을 제기하고 있지만, 보다 체계적인 유구조사와 복원이 절실하며 집주인 김윤제에 대한 연구 또한 필요함을 느낀다.
정면으로 바라 보이는 물줄기를 보면 소쇄원과 환벽당의 중간 짐에 벽간당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다고 하나,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고 지역 사람들에 의해 그 곳이 벽당간 뜰이었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 사진설명=환벽당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사촌 김윤제가 주인인 것은 확실하다. 이곳에서 사촌은 소년 정 철을 제자로 삼아 나라의 동량으로 키워낸 강학소 역할을 했다.
서브 사진설명=키 낮은 대문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겸손함을 일깨워 주고 있으며. 환벽당을 오르는 층계는 푸르른 이끼로 덮여 인걸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