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정신 뿌리찾는 정자기행(13)=식영정(상)
▲석천 임억령의 생애
16세기 민중의 정신적 받침목이 되었던 큰 선비 석천 임억령(林億齡·1496~1568).
그는 정치에 아첨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연과 벗하면서 시문(詩文)과 학문(學文)에 진력, 인격과 덕망을 쌓아 충·효·제·신(忠孝悌信) 등 윤리도덕이 충만했던 고결한 선비였다.
석천의 정신이 스며있는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별뫼(星山) 밑에 자리한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의 이끼 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며 그의 생애와 인품을 더듬어 본다.
석천은 하의도인(荷衣道人)으로서 연산군 2년인 1496년에 해남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눌재 박 상과 박 우 형제에게서 수학을 했으며, 21세때 진사가 되고 30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에 나갔다. 40대에는 사간원의 사간 및 대사관, 홍문관의 전한 및 응교를 역임하였으나 50세 을사사화가 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은거 하였다.
▲눌재 형재와의 만남
눌재에게서 배운 그의 시문(詩文)은 향리와 담양의 성산 일대를 왕래하는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는데, 그 처소로는 서하당 김성원이 그를 위해 지어주었다는 식영정이 으뜸으로 꼽힌다.
무등산 북쪽 원효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은 창계천(창암천)으로 흐르다가 광주호에 잠시 머문다.
광주호는 인공호수로 댐이 생기기 전 창계천가에는 배롱나무가 줄지어 서서 여름 내내 붉은 꽃구름을 이루었다. 그래서 창계천의 옛 이름은 자미탄이었다. 자미(紫薇)는 배롱나무의 한자 이름이다.
이 곳엔 송강 정 철이 살던 지실 마을이 있고, 또 별뫼(성산)가 있는 자미탄 이쪽 저쪽으로는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소쇄원 등 누정문학의 본 고장을 일구었던 유적이 흩어져 있다.
그 중 식영정은 성산의 한 끝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곰실곰실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가 섰고 앞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 보이며 그 건너로 무등산이 언제나 듬직하게 바라다 보인다.
정면 2칸, 측면 2칸 정자에는 한 칸 반짜리 방이 있고 또 당연히 너른 마루가 있다.
▲김성원이 석천에 정자 기증
명종 15년(1560), 지금 식영정이 있는 곳 아래쪽에 서하당을 세우고 지내던 김성원(1525∼1568)은 새로 이 정자를 지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에게 주었다. 임억령은 을사사화가 나던 1545년에 동생 임백령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선비들을 추방하자 그는 자책을 느끼고 금산 군수직에서 물러나 해남에 은거했다. 나중에 다시 등용된 후 1557년에는 담양 부사가 되었다. 임억령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했으며 시와 문장에 탁월했지만 관리로 일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당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런 임억령인지라 정자 이름을 짓는 데도 역시 시인다운 남다름이 있었다.
식영정(息影亭)이란‘그림자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아무 맥락을 모르고 그 이름만 듣더라도 가슴이 흥건해지는데, 그가 쓴 ‘식영전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그림자는 언제나 본형을 따라 다니게 마련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연법칙의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는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화옹(造化翁)과 함께 어울리어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 … 그러니 ‘식영’이라고 이름짓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그림자는 내버려 두고 그 이전의 경지에서 조화옹과 더불어 노닌다’는 이 유래를 알고 보면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그저 서정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주인을 찾아, 이곳에는 수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송 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
그 중에서도 임억령, 김성원, 정 철, 고경명은 식영정 4선(仙)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들은 식영정에서 보이고 들리는 풍경들을 시제로 하여 수많은 시를 남겼다.
▲송강의 ‘성산별곡’탯자리
그러나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송 강의 ‘성산별곡’이다. ‘성산별곡’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성산 주변의 풍경화 그 속에서 노니는 서하당 식영정 주인 김성원의 풍류를 그리고 있다.
식영정 뒤편에는 배롱나무 서너 그루가 있어서 이제는 사라진 자미탄의 모습을 그려 보게 한다.
임억령은 ‘누가 가장 아끼던 것을 산 아래 시내에다 심었나 보다’라고 자미탄을 노래했다.
뒤편 공간에는 누가 썼는지 무덤이 하나 있는데, 그 뒤로 멀찍이 물러서서 식영정의 뒷모습 너머 붕 떠오르는 듯한 무등산 정상을 바라 보노라면 따로 말이 필요없다.
식영정에서 내려와 왼편 안쪽으로 보이는 부용당은 1972년에 지어진 것이고, 그 뒤에는 김성원이 거처하던 서하당 자리가 있다.
또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는 마치 ‘백억불 수출탑’을 연상시키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석물이 잇다. 식영정 옆의 잘 생긴 소나무를 딱 가리고 선 우람한 성산별곡 시비와 함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잊은 우리 시대를 증거하는 듯 하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 사진(가로)=16세기 민중의 정신적 받침목이 되었던 큰 선비 석천 임억령. 이곳은 지금도 그의 채취가 물씬 풍기듯한 아름드리 나무가 버티고 있다.
서브 사진(세로)=정치에 아첨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은 그의 인품처럼 식영정을 오르는 이끼 낀 돌계단은 객들의 발길을 숙연케 하고 있다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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