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9)-소쇄원과 사림들

화이트보스 2009. 1. 13. 11:27

소쇄원은 주인 양산보를 위한 별서(別墅)였는가?

담양의 소쇄원을 일컬어 ‘동양 최대의 정원’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 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소쇄원은 호남 큰 선비들의 사랑방이었고, 훗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낳게한 ‘광주정신’의 탯자리였다.



▲소쇄옹,‘봉황’염원 절절

소쇄원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뒤적여 보아도 양산보의 작품은 거의 전하지 않고, 사돈인 하서 김인후와 의병장 고경명, 정승 송강 정 철(鄭 澈) 등의 시가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이처럼 주인인 소쇄옹은 자리만 마련했을 뿐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손님들의 숙식과 봉사에만 신경을 썼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하서 김인후 같은 이는 한 번 소쇄원에 내왕하면 일주일 이상 머무르며 자기 집 같이 즐겼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쇄원은 다른 별서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목적을 갖고있음을 알수 있다.

즉 사용자는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사실이다.

입구 쪽에 세워진 대봉대(待鳳臺)와 초가 정자는 시원한 벽오동 그늘 아래서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다.

과연 소쇄옹이 기다리는 ‘봉황’은 누구였을까.

그가 애타게 염원하는 ‘봉황’은 일반적인 내왕객이 아니라 매우 ‘귀한 손님’이었으리라.

‘봉황’에 대한 그의 염원은 소쇄원 계곡에 쏟아지는 폭포수의 모습까지도 봉황새의 춤으로 해석할 정도였으니 소쇄옹의 간절한 기다림(?)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귀한 손님’이란 자신의 절친한 교우이자 성숙한 학자이며, 높은 경지의 예술가들이었다.

아마 그는 많은 한을 남기며 죽어간 스승 정암 조광조와 같은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문난 인물들을 초청하고, 그들과의 교우를 위해 이처럼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봉황’을 기다리는 염원은 비단 양산보 뿐 아니라 이 부근 원림 주인들의 공통된 염원이었다.

‘기다림’의 염원은 소쇄원 전체 구성에도 중요한 건축적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광풍각과 제월당은 계곡 넘어 대봉대 쪽의 진입로를 바라보도록 구성됐다.

반대로 진입할 때의 시선은 건너편 원림의 전경을 바라보며, 동시에 길을 따라 펼쳐지는 담장과 나무그늘들을 바라보도록 되었다.

소쇄원은 이처럼 철저하게 ‘손님’들을 위해 조성됐음을 건축학적인 측면에서도 쉽게 감지할수 있다.



▲소쇄원 사람들의 보존 노력

아직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이 곳을 방문하면 인심좋은 주인들이 ‘소쇄원도’ 목판을 꺼내어 자랑스럽게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이 귀중한 목판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곧 도난당하고 말았다.

양산보의 은둔적 전통은 후손들 역시 큰 벼슬에 뜻이 없도록 만들었다.

큰 벼슬을 못했다는 사실은 충분한 재력이 없었다는 말과 상통한다. 유명 문벌 만석꾼의 건축들도 온전히 보존된 것이 드문 오늘날, 부(富)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양씨 가문이 소쇄원을 온전히 지켜온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양산보는 평소 “소쇄원은 어느 언덕 골짜기를 막론하고 내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으니, 평천장의 옛 이야기에 따라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어느 한 후손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했다.

선조의 유훈(遺訓)은 지금까지 후손들에게 착실히 받들어지고 있다.

이후 양씨 가문에는 ‘세가지 금기’의 가훈이 만들어졌다.

첫째, 어느 경우에도 소쇄원을 양도하지 말것. 둘째, 종손은 이사가지 말것. 셋째, 제사를 건너뛰지 말 것.

80년 중반들어서 부터 공휴일 오후엔 소쇄원을 찾는 인파가 부쩍 늘고 있다.

소쇄옹 15대손 양재영씨가 공식적인 ‘설명회’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소쇄원의 내력부터 각 부분의 설명을 거쳐 원림의 음양오행적 구성원리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소쇄옹 후손들의 보존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이면 ‘용량’을 초과한 관람객들의 입장으로, 곳곳에 쓰레기가 쌓이고 수목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결혼시즌에는 결혼사진 촬영장으로, 10대들의 미팅장으로, 회사원들의 야유회장으로 바뀌어 항상 소란스럽고 유행가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이제는 ‘소쇄’(瀟灑)하지 못한 북새통을 보면서, 소쇄원의 생명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소쇄원을 다시 ‘소쇄’하기위 해서는 먼저 관람인원을 제한하는 일이 급선무 일 것이다.

이와함께 문화재의 보존과 소쇄원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자긍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도 고액의 입장료와 주차료를 받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뿐만아니라 15대손 직강 설명회의 참가비도 받아, 여기서 모아진 작은 잉여금이라도 소쇄원 보존에 재투자해 훼손위기에 놓인 소쇄원에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한다.

‘광주정신의 탯자리’소쇄원….

오늘도 소쇄원은 하늘을 찌를듯한 잎푸른 대나무숲에 싸여 청아한 물소리에 취해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사진=소쇄옹은 대봉대(待鳳臺)를 지어 ‘봉황’(鳳凰’을 간절히 기다리며, 어지러운 나라를 걱정했다. 여기서 교유한 선비들은 오늘날 광주정신의 원류를 태동시킨 것이다.

서브사진=소쇄원의 주요 단골손님은 하서 김인후였다. 하서는 이곳에 내왕하면 1주일이상 머물며 자기집처럼 즐겼다.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