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4)=식영정(중)
조선 중기 대쪽같은 선비 석천 임억령(林億齡·1496~1568년), 그의 체취가 물씬 밴 식영정(息影亭)엔 봄기운에 취해 아름드리 소나무가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그 아래 위풍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송강 정 철의 ‘성산별곡 비’가 이끼 낀 돌계단을 다소곳이 내려다 보며 길손을 맞는듯 하다. 그래서 마치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고 있다.
뿐인가, 정자의 뒤뜰에는 큰 나무로 자란 백일홍 10여그루가 남아있어 옛날의 정취를 되돌아보게 한다.
식영정에서 내려와 왼편 안쪽으로 보이는 부용당은 원래 연못 터였던 곳인데 1972년 새로 정자를 지은 것이고, 그 뒤에는 김성원이 거처하던 서하당을 새로 복원했다.
▲석천과 사림들
석천 임억령과 교류를 했던 인물로는 나주의 금호 임형수, 사암 박 순, 연파거사 박 개, 광주의 사촌 김윤제, 칠계 김언거, 장성의 하서 김인후, 지지당 송 흠, 담양의 면앙정 송 순, 소쇄처사 양산보, 고암 양자징, 장흥의 옥봉 백광훈, 해남의 귤정 윤 구와 청련 이후백,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송강 정 철 등 호남지역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다.
그의 시작(詩作) 활동은 대단하여 지은 시가 2,300여수에 이르며, 특히 송강 정 철이 지었다는 성산별곡 또한 그가 교유했던 인물과 각기 지었다던 식영정 20영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리고 별곡의 노래 또한 석천을 지칭하며 노래하였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성품은 곧아 동생인 임백령이 을사사화때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일의 모사에 깊게 관여하며 그에게 함께 하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석천은 동생을 강경하게 말리며 참여하지 말라고 권했다. 하지만 동생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것은 그의 성품됨을 잘 나타내주는 일 중의 하나다.
▲호남문학 큰 울림의 산실
현재까지 전하는 석천의 2,300여수의 시들은 사화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늘 소외되고 착취 대상이었던 백성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시편들이다.
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모하는 우국충군(憂國忠君)의 시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낭만적이고 정감어린 시상 등 쉽게 논단 하기조차 힘든 다양하고 격조 높은 내용들로 국문학사를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석천은 세속 보다는 승경을 찾아 향촌에 칩거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심성 도야에 치중함으로써 자신을 우뚝 세웠던 것이다.
안빈낙도의 생활 속에서 천심(天心)의 조화에 순응하는 선인들의 천로역정을 시문학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했는가 하면 한편으론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로 시대를 이끌었다.
말하자면 이 선비정신은 온 민중의 핏속에 깊숙이 깔려 한반도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석천의 이러한 사상은 1545년 을사사화때 신병을 핑계로 낙향하면서 아우 백령에게 보낸 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물결 일구지 마라
외로운 배 일찍 닻 내려야 하나니
풍랑은 밤새도록 일 것 같구나.
▲북향사배(北向四拜) 후 녹권 불살라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 조정에서 원종록권을 보내왔지만, 깊은 골짜기에서 제문을 지어 읽고 북향사배(北向四拜) 한 후 녹권을 불살랐다.
7년 뒤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복승지로 재임됐다가 담양부사와 옥과 현감으로 겸직했으나 1558년 벼슬을 버리고 담양 성산의 승경에 귀의했던 것이다.
석천은 그후 서하당과 식영정에서 보내면서 이 곳 출신의 사림들과 벗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평생을 보냈다.
식영정 현판을 올려다 보자. 바로 머리 위에 송강 정 철의 식영잡영십수(息影雜影十首) 중 선유동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그 어느해 해상의 신선이
구름 서린 산 속에 깃들었던고
발자취 어루만지며 슬퍼하노라
하얗게 머리 센 문하의 선비가.
송강이 스승이자 식영정의 주인인 석천 임억령을 기리는 글이다.
식영정에 은거하던 스승이 그림자를 거두고 별이 되어 선계로 올라갔다는 식영(息影)의 뜻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식영정 20영 현존
식영정 20영은 석천 임억령이 성산동 식영정 일대의 정경을 자유롭게 묘사한 시로써 이것을 묘본으로 면앙정 송 순은 화답시를 지었고, 송강 정 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은 차운시를 남겼다.
식영정의 난간에 걸터앉아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 20영을 되뇌여 본다.
-석양 해질 무렵 산골짜기에서
창룡이 은물결 내뿜는다
주머니 속에 거두어 담을 수 있다면
더위에 지친 사람에게 부쳐주고 싶다
환벽당과 식영정 사이를 흐르는 창계천이 끊임없이 흐름으로써 나타나는 흰 물결의 묘취를 읊은 시다.
현재의 환벽당 아래 창계천이 광주호로 돌아 빠지면 식영정 앞의 창계천이 옛날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봄의 깊으면 깊을수록 식영정을 에워싸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은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지조높은 조선의 큰 선비 마음을 읽으려는 객들이 오늘도 이끼 낀 식영정 계단을 오르며 석천의 온기를 더듬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 사진=석천 임억령의 숨결이 스며있는 식영정(息影亭). 이 곳엔 지조있는 조선의 큰 선비가 묶은 자리답게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와 백일홍이 간간히 찾아오는 객을 맞고 있다.
▲서브사진=식영정 옆에 우뚝 서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는 이 곳 정자와 함께 새로운 명물로 부상하고 있다.
#### 국장님께서 지시하신 식영정을 두고 송강과 석천의 논란은 하편에 자세히 소개합니다.
박주하
'풍수기행 >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6)=송강정(上) (0) | 2009.01.13 |
---|---|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5)=식영정(下) (0) | 2009.01.13 |
광주정신 뿌리찾는 정자기행(13)=식영정(上) (0) | 2009.01.13 |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1)=환벽당과 김윤제 (0) | 2009.01.13 |
광주정신 뿌리찾는 정자기행(10) (0) | 2009.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