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정(상)
송강 정 철(鄭澈·1536~1593), 그는 야심만만한 정치가요, 우리 문학사 최고의 시인, 그리고 수많은 정적(政敵)을 제거한 매파의 우두머리 등이었다. 이처럼 그가 수많은 대명사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서 정치·문화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송강정 가는 길
송강정은 정 철이 49세되던 해인 선조 17년(1584),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이곳 담양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4년 동안 기거하며 재기를 꿈꾸었던 곳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 날, 송강정을 찾아 나선 길손의 마음은 상쾌함보다 다소 숙연함이 심연으로 스며들었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에 있는 송강정은 조선시대 송강 정 철과 관련된 유적으로, 식영정, 환벽당과 더불어 전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되었다.
▲송강정서 4년동안 머물러
당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다시 우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나가기 까지 4년 가량을 이곳에 머물면서‘사미인곡’,‘속미인곡’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겼다.
그의 자(子)는 계함(季涵), 송강(松江)이라는 호(號)는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임정(臨汀)이라는 호도 있다.
▲송강정 옛 이름은 ‘죽록정’
‘송강’이라는 호는 담양 창평에 있는 죽록천(竹錄川)의 별칭에 말미암은 것이고, 임정(臨汀)은 그의 본관 영일(迎日)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에서 출생한 송강이 이곳 담양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을사사화 피화로 조상의 산소가 있는 창평 당지산 아래로 낙향한데서 비롯됐다.
야산 중턱에 자리한 송강정(죽록정이라고도 함)은 정 철이 동인들의 압박에 못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담양으로 내려와 초막으로 죽록정을 짓고 기거했다. 그 당시 이 초막을 ‘죽록정’이라 불렀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 철을 기리기 위해 1770년 세운 것인데, 그 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개칭했다.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 ‘송강정(松江亭)’이라고 새긴 판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죽록정(竹錄亭)’이라는 편액도 보인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수려함을 조망할 수 있다. 이 곳에‘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송강,16세 때 담양과 첫 인연
18세기들어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진채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이 총총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 철의 후손들이 영조 46년(1770)에 무덤을 옮기게 하고, 언덕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는 다시 정자를 지었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송강천이라 하기도 함)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부르므로 정자도 오래 전부터 ‘죽록정’이라고 불러 왔다.
지금도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과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만 보아서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정 철이 담양 창평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나중에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가의 자식으로 유복하게 지냈다.
권력과 부(富)를 함께했던 누렸던 정 철의 어린시절은 그가 열살되던 해(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 철도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소년 정 철, 호남사림에 수학
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여섯살이 되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후 10여년 동안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웅정, 면앙정 송 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 땅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의 자질을 흠뻑 길렀고 율곡 이 이와 우계 성 혼과도 사귀었다.
정자는 정면3칸에 측면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로 되어 있다.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사진설명=송강 정 철이 49세때 당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대사헌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 담양으로 내려와 송강정을 짓고 4년여동안을 생활했다.
서브사진설명=조선시대 야망의 정치가 정 철의 체취가 묻어있는 송강정. 간간히 불어오는 솔바람에 이끼는 푸르름을 더해 정자를 길손들을 숙연케하고 있다
박주하
송강 정 철(鄭澈·1536~1593), 그는 야심만만한 정치가요, 우리 문학사 최고의 시인, 그리고 수많은 정적(政敵)을 제거한 매파의 우두머리 등이었다. 이처럼 그가 수많은 대명사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서 정치·문화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송강정 가는 길
송강정은 정 철이 49세되던 해인 선조 17년(1584),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이곳 담양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4년 동안 기거하며 재기를 꿈꾸었던 곳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 날, 송강정을 찾아 나선 길손의 마음은 상쾌함보다 다소 숙연함이 심연으로 스며들었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에 있는 송강정은 조선시대 송강 정 철과 관련된 유적으로, 식영정, 환벽당과 더불어 전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되었다.
▲송강정서 4년동안 머물러
당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다시 우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나가기 까지 4년 가량을 이곳에 머물면서‘사미인곡’,‘속미인곡’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겼다.
그의 자(子)는 계함(季涵), 송강(松江)이라는 호(號)는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임정(臨汀)이라는 호도 있다.
▲송강정 옛 이름은 ‘죽록정’
‘송강’이라는 호는 담양 창평에 있는 죽록천(竹錄川)의 별칭에 말미암은 것이고, 임정(臨汀)은 그의 본관 영일(迎日)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에서 출생한 송강이 이곳 담양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을사사화 피화로 조상의 산소가 있는 창평 당지산 아래로 낙향한데서 비롯됐다.
야산 중턱에 자리한 송강정(죽록정이라고도 함)은 정 철이 동인들의 압박에 못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담양으로 내려와 초막으로 죽록정을 짓고 기거했다. 그 당시 이 초막을 ‘죽록정’이라 불렀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 철을 기리기 위해 1770년 세운 것인데, 그 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개칭했다.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 ‘송강정(松江亭)’이라고 새긴 판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죽록정(竹錄亭)’이라는 편액도 보인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수려함을 조망할 수 있다. 이 곳에‘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송강,16세 때 담양과 첫 인연
18세기들어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진채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이 총총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 철의 후손들이 영조 46년(1770)에 무덤을 옮기게 하고, 언덕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는 다시 정자를 지었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송강천이라 하기도 함)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부르므로 정자도 오래 전부터 ‘죽록정’이라고 불러 왔다.
지금도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과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만 보아서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정 철이 담양 창평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나중에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가의 자식으로 유복하게 지냈다.
권력과 부(富)를 함께했던 누렸던 정 철의 어린시절은 그가 열살되던 해(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 철도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소년 정 철, 호남사림에 수학
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여섯살이 되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후 10여년 동안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웅정, 면앙정 송 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 땅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의 자질을 흠뻑 길렀고 율곡 이 이와 우계 성 혼과도 사귀었다.
정자는 정면3칸에 측면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로 되어 있다.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사진설명=송강 정 철이 49세때 당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대사헌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 담양으로 내려와 송강정을 짓고 4년여동안을 생활했다.
서브사진설명=조선시대 야망의 정치가 정 철의 체취가 묻어있는 송강정. 간간히 불어오는 솔바람에 이끼는 푸르름을 더해 정자를 길손들을 숙연케하고 있다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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