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18)=송강정(下)

화이트보스 2009. 1. 13. 11:38
엇던 디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말 듯소
인생 세간에 조흔 일 하건마는
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성산별곡’ 일부>

식영정과 함께 한국 시가문학의 탯자리로 자리한 송강정(송松江亭), 이 정자는 조선시대 호남사림들의 사랑방으로, ‘사미인곡’‘속미인곡’의 탯자리로, 훗날 광주정신을 싹틔운 곳으로 유명하다.
송강 정 철(鄭澈·1536~1593)은 증암천을 끼고 있는 식영정과 스승인 송순의 면앙정이 바라보이는 이 곳 정자에서 4년여 동안 머무르며 호남의 큰 선비들과 교유했다.
송강정은 400여년전 주인의 풍류적 인품을 말해주듯 나이 먹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발 아래 죽록천이 송강의 일화라도 전해주는 듯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400년 켜켜이 쌓인 마루에 방금 날린 꽃잎이 쓸쓸이 뒹글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종달새 두 어 마리 처마 끝에 앉아 재잘거려 길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 정자는 송강의 학문·사상·풍류·시가 샘물처럼 퍼올려진 역사적인 장소였다. 파란이 중첩된 당쟁의 와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송강,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이 곳을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마냥 정겹기만 하다.
▲송강, 네 차례 담양과 인연
송강은 크게 네차례에 걸쳐 향리 창평으로 낙향했다. 당대 정치현실의 풍파와 붕당간의 역학관계로 말미암아, 경국제민의 사회현실에서 벗어나 처사로서의 삶을 살아 간 것이다.
창평의 향리 생활 기간은 송강의 일생 중 가장 뜻 깊은 의미를 갖는다.
고양 신원에서 어버이 시묘살이를 한 기간을 제외하면 네 차례의 낙향 모두 그가 벼슬길에 나아간 후, 비로소 긴장된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정서적으로 여유있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실의와 역경에 처했던 시기였을 망정, 문학적으로는 실로 보람있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들 가운데 이 시기에 지어진 작품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송강의 향리 생활은 주로 글을 읽고 사색하거나 시를 짓는 한편, 성산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 원림(園林: 동산과 숲의 자연상태를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일종의 정원)을 출입하며, 거기에 모여든 당대의 쟁쟁한 문인·학자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시(詩)를 주고 받으며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이어졌다. 상산은 곧 그의 향리 생활의 중심 무대였던 것이다.
▲강화 송정촌서 살별로 지다
송강은 성산 주변의 정자와 원림들 가운데서도 특히 식영정과 서하당을 자주 찾았다. 이 두 곳은 거의 나란히 붙어 있는데, 모두 그와 동문수학(同文修學)한 서하 김성원과 관계가 깊다. 식영정은 서하가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어드린 곳이고, 사하당은 바로 김성원이 사는 거처이기 때문이다. 송강과 서하가 둘도 없는 지기(知己)라는 사실은 새삼 거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식영정에 머물렀던 석천 역시 송강의 스승이기도 했던 점을 생각 한다면 그가 이 두 곳을 특히 자주 찾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강은 당쟁으로 인해 조정에서 물러난 지 불과 한 달 정도인 1593년(선조 26년)12월 18일, 마침내 강화 송정촌 거처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5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둘 때 둘째아들 종명(宗溟)이 옆에 있었는데, 병환이 급하게 되자 손가락을 갈라 피를 내어 드리니, 송강은 감은 눈을 살며시 뜨고서 “이 아이가 헛된 일을 하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00년동안 잠들지 못한 송강
58세로 생을 마감한 송강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듬해 2월 고양군 신원에서 장사(葬事)가 치러진 이후, 그때 그때 붕당의 형세에 따라 실로 여러 차례 생전의 관작(官爵: 관직과 작위)이 깎여 없어졌다 회복되는 수난을 겪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런 악순환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이 1694년(숙종 20년) 4월이었으니, 송강은 죽은 후 100년이 넘도록 편히 잠들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정치가가 아닌 문인 송강이 남긴 수 많은 작품은 우리 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한문으로 된 글을 문학의 진면목으로 여겼던 당시 상황를 비춰볼 때 참신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세련시켜 차원 높은 예술 언어로 끌어 올렸다는 점이 훗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송강문학 국문학사 한 획
송강을 우리말 문학이 비약적 발전을 한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작가로 손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가 생존·활동하던 당대의 문학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학인들까지도 송강 시가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문학일 수 있음을 주목·강조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송강에서 ‘위대한 시인’의 칭호를 부여해도 좋을 듯하다. 요컨대 송강만큼 우리말의 특성을 잘 살려서 민족 고유의 정서와 정감의 세계를 다채롭게 형상화 한 시인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송강은 그의 작품과 더불어 우리 문학사에서 위대한 시인으로 남아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 오늘날까지도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