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와 필암서원(上)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文廟)에 배양돼 전라도를 파벽시킨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하서는 1510년 7월 19일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담제(湛齊) 또는 하서(河西)라 했으며, 본관은 울산(蔚山)으로 명종 15년(1560)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神童 소년, 네살 때 글 습득
하서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신동(神童)으로 칭송을 받았다. 두 살때 가끔 몸이 아파 약을 먹이면 아무리 쓴약이라도 태연히 마시고, 세 살때 어린 종의 등에 업혀 다니면서도 반드시 큰 길로 다니도록 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네 살때 이미 글을 뗀 하서는 다섯 살때‘우주공황대인거지(宇宙珙荒大人居之·우주의 넓고 큼이여, 큰 인물이 사는도다)’라는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0세때(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 김안국(金安國)이 전라감사로 부임해 소년 김인후의 학식을 시험해 보고는‘내 小友이며 3대에 걸칠 인물’이라 평했다. 그때부터 그의 문하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계기가 됐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간 하서는 이 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옥과 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주자학 통치이념 확립 기여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 항(李恒)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그는 이 황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서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 하였다. 죽은 후 문묘(文廟)를 비롯,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하서집’,‘주역 관상편’, ‘서명사천도’ 등이 있다.
김인후는 조선12대 임금 인종(1515~1545)과 각별한 사이였다. 세자시절 그 앞에 나아가 강의를 했고, 그런 인연으로 묵죽도(墨竹圖)를 하사 받기도 했다. 그 묵죽도 판각이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국가 사적지 242호) 경장각에 보관돼 있다.
묵죽도 하단에는 그림과 어우러진 하서의 시가 적혀있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지극히 정교하고
돌 같은 우정이 그 안에 있네
조화로운 성신(聖神)을 깨닫기 시작하니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거스름이 없어라”
하지만 불우하게도 인종은 재임 8개월 만에 병사(病死)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하서는 낙향하고 이후로 벼슬 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다.
하서는 인종이 승하한 음력 7월 1일이면, 술을 가지고 집 남쪽의 난산에 올라가 한 잔 마시고 한 번 곡(哭)하며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토록 거른 적이 없었다.
하서는 “시(詩)가 아니면 바로 설 수 없다”고 여겼고, 많은 생각을 시로 표현했다.
▲한시 1천600여수 지어
그가 남긴 한시는 1천600수 가량 되며 단가는 3수가 있다. 40대 중반에 지은 ‘자연가’에는 자연과 벗삼고 안정 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산수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
하서의 묘는 필암서원 건너편의 맥호리 맥동마을에 있는데, 그 아래쪽에는 팔 하나만 묻힌 일명 일비장(一臂蔣)이라고 부르는 묘가 있다. 하서의 손자 며느리인 기씨(奇氏) 부인의 묘다.
기씨 부인은 정유재란 때에 왜놈에 붙잡힌 몸을 빼려고 자신의 팔을 자르고는 물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해서 팔만 묻고 장례를 치렀다. 그 기씨 부인이 이 황과 8년 동안 서신으로 사단칠정론의 논쟁을 벌인 기대승(1527~1572)의 딸이다. 기대승은 필암서원에서 20리쯤 남쪽으로 내려간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 사람으로, 하서와 교류가 돈독하였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메인사진=호남유림의 종장으로 추앙 받았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그는 장성에 탯자리를 묻은 조선의 큰 선비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文廟)에 배양되었다.
서브사진=장성 필암서원에는 하서와 그의 제자겸 사위인 고암 양자징이 나란히 봉안돼 있다.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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