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 송 순의 생애(상)
우리나라 국문학상 이름난 시가시인(詩歌詩人)을 든다면 면앙정 송 순을 비롯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노계 박인로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송강이나 고산에 앞서 우리 시가문학의 꽃을 피게 한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은 역시 면앙정 송 순(宋純·1493~1582)이다.
◇신평송씨와 담양
송 순(宋 純)은 조선 성종 24년 11월 14일 담양군 기곡면(현재 봉산면)상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태(泰)는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을 통한히 여겨 자식을 가르치는데 남달리 힘썼고 어머니 조씨(趙氏)는 효성과 화목하는 마음이 어진 여성으로 지극히 인자해 고을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송 순은 어린시절을 상덕리에서 보내면서 만행의 근원인 효(孝)를 바탕으로 삼고, 인격과 문학을 익히며 자랐다. 자질이 또한 영오해서 세살때 독서를 시작했고 재예(才藝)가 특출했으며, 9세에는 ‘곡조문’(哭鳥文)이란 시를 지어 세인을 놀라게 했다.
유년기에 학문은 집안의 숙항되는 지지당(知止堂) 송 흠(宋 欽)에게서 배웠다. 21세에 이미 진사가 되고, 동년에 담양부사로 재임중이던 성품이 엄준하고 소허가견(少許可見)하기로 이름난 박 상(朴 祥)의 칭찬을 받고 문하로 입문한다.
이어서 박 우(朴 祐)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큰 기회를 얻어 인생의 방향을 잡았다.
27세 중종 14년 기묘별시방(己卯別試榜)에서 ‘책’(策)을 지어 시관인 안 당, 조광조, 김 구, 김 식으로부터 ‘김일손 이후 무비문장(無比文章)’이라는 칭찬을 받고 등방되어 승문원 부정자로 시작해 50년 환로(宦路)생활의 지평을 열어 정2품 의정부 우참찬에 이른다.
◇정통 사림학통의 송 순
송 순의 학통은 정통 사림에 속한다. 고려때 사림파 학통으로는 유신으로 선산에서 후진교육에 전념하던 길 재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나왔으며, 조선초 사림파의 텃밭은 영남의 김종직에게서 시작됐다.
그 가운데 밀양의 김종직은 당시 사종(辭宗)으로서 그 일파는 사림 간에 유연한 세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성종의 배려로 중앙부서로 진출하여 벼슬을 하게된다.
이들과 진원지가 다르고 중앙정부에 기반이 탄탄한 훈구파와의 사이에 자연히 반목과 대립이 시작된다.
즉 신진인 사림파는 성리학을 주로 하고 대체로 대간·홍문관에 직을 가진 진보적 경향을 지녔다. 이와는 다르게 훈구파는 세조의 충신인 기성세력으로 보수적 경향을 띠었다.
이것이 훗날 사화의 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박 상, 김 정, 김 식, 김 구 등이 당시 사림의 큰 인물이다.
송 순은 이 중 박 상(朴 祥)의 제자로, 박 상의 통서는 길재-김종직-김굉필- 조광조- 박 상-송 순으로 이어진 사림의 정통맥이다.
이때 송 순은 성수침, 이퇴계, 박 우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고, 김인후, 신광한, 이 이, 기대승, 정 철, 임 제, 고경명 등 100여명의 명사가 그 문하를 출입하였다. 성수침은 송 순의 벗과 제자를 두고 천하의 도이(桃李)가 모두 공의 문하에 있다고 지적했다.
◇결코 순탄치않은 삶
송 순이 살았던 16세기의 조선조는 시대적 상황이 순탄하지 못했다. 큰 외환은 없었다고 하나 반정과 사화의 내환이 거듭되었고, 파당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위정자의 선비에 대한 피의 숙청이 끊이질 않았던 험란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50년의 긴 환로(宦路)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유배된 것은 단 한차례다.
송 순은 윤원형 일파인 진복창, 허 자, 이 기 등의 배척을 받아서 이들의 사주로 인해 이무강이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에게 ‘사특한 언론을 편 자이다’라고 알려져 58세이던 1550년 6월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됐다가 같은해 겨울 무죄 방환된 것이 그의 유일한 유배생활이다.
이처럼 송 순의 순탄한 환로생활에 대해 혹자는 ‘처세에 능한 정치꾼’이라고 격하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위지의 고택을 일부러 찾아서 흠모하고,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명현의 누명을 벗기려고 공론을 세웠으며, 권신 전복창을 소인(小人)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했던 의로운 인물이었다.
송 순의 신조는 ‘관용(寬容)과 대도(大道)’의 삶을 살았다.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지냈고 제자였던 정 철은 송 순이 타계하자 바로 달려와서 간곡히 제문을 지었다.
-오호라, 풍진의 험난한 길을 겪은 자 많으나, 그 넘어지지 않은 이는 또한 적은데, 조정에 서 있는 60여 년을 대로(大路)만 따르며, 마침내 크게 넘어지지 않은 이로 상공(相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비통함이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 슬프고 서롭도다.
송 순은 일생을 살면서 작은 길은 피하고 당당한 대로(大路)만을 걸었다. 대로(大路)는 사심이 없는 송 순의 사상을 오늘날 그대로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4·13총선이 얼마 남지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파간·계파간 세(勢)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당시처럼 피비린내는 풍기지 않지만 그 이상의 흑색전선과 상호비방이 난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호남의 큰 선비 면앙정 송 순의 발자취는 후학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메인사진설명=호남 시가문학의 대부(大父) 면앙정 송 순, 그는 정통 사림학통을 이으며 호남의 큰 선비를 길러 오늘날 ‘광주 정신’을 이끌었다.
서브사진=언덕배기에 고즈넉이 자리한 면앙정은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개탄이라고 하듯 솔숲에 싸여 짙은 솔향을 내뿜고 있다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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