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27)=수남학구당

화이트보스 2009. 1. 13. 11:48

(27)수남학구당
▲수남학구당
허름한 목조와가(木造瓦家) 앞엔 지난해 휘몰아친 태풍을 견디다 못해 꺾인 한그루의 늙은 소나무만이 이름모를 풀향기에 취한 채 길손을 맞고 있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 광주댐이 고즈넉이 내려다 보이는 이 당(堂)은 조선중기 지역 동량들의 학문 탐구를 위해 1570년 건립된 것으로, 4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위풍 당당함을 잃지 않고 서 있다.
영남의 학문이 서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호남의 학문은 누정과 서원이 상호 보완해 형성됐다.
지방민의 높은 교육열을 반영하듯 관학(官學)으로 중앙에 성균관(成均館), 지방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사학(私學)으로 서원(書院), 서재(書齋), 서당(書堂) 등이 있었는데 유독 이곳 담양만이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두 곳의 학구당(學求堂)이 존재하고 있다.
수남학구당은 조선후기 소쇄원 양산보의 아들 고암 양자징과 분향리의 조여심(曺汝諶·1518~1586) 등의 주축으로 창평현에 거주하는 25개 성씨들이 추렴, 지역 인재양성을 위해 만든 전국 유일의 공립 고등교육 기관이다. 이 당(堂)은 오늘날 시립대학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수남학구당 자리는‘향적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의 개국으로 불교가 쇠퇴하자 스님 조호심(曺好諶)이 승려들을 불러모아 삼봉서사(三峰書舍)라 이름하고 강학을 했다. 훗날 고암 양자징 등이 이곳에서 강론을 하여 기암 정홍명(송강의 넷째 아들)과 조홍립 등을 배출했다.
수남학구당 왼쪽으로는 봉황동이 있고 남쪽으로 3봉(장원봉, 효자봉, 열녀봉)이 둘러 있으며, 그 산 밑자락에 용이 놀았다는 용담이란 연못이 있다. 이로볼때 그 모양을 소상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학구당은 봉황과 용으로 대표되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런 인재를 양성하는 곳 이었음이 분명하다.
수남학구당은 조선 선조 3년(1570) 창평지역에 살고 있는 토박이 성씨들이 숭고한 도의(道義)와 국가의 문무정책(文武政策)에 따라 학업을 연구하며, 유교(儒敎)의 기풍을 진작하기 위하여 당초 서원으로 창건했다가 1619년‘학구당(學求堂)’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후 수차례 중수(重修)를 거쳐 현재는 본당 4칸, 2층 4칸 관리사 3칸이 있다.
이 지역에 산재한 모든 정자와 누정이 그렇듯 수남학구당 역시 역사의 격랑 흔적이 역력히 스며있는 곳이다.
당초 수남학구당은 고려시대 불교 진흥정책에 따라 사원으로 건립 됐다. 그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회적 이념이 척불숭유정책(斥佛崇儒政策)으로 바뀌게 되자 전대(前代)의 정치이념의 구조물 등을 없애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서원을 학구당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가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맞는 구조물들을 전대(前代)의 구조물 자리에 새로이‘학구당’을 건립해 현재의 정책을 유지·확립 시키려는 의도였으리라.
다시 말해서 사찰이 있었던 것을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書院)이나 향교 (鄕校)를 건립하여 전 왕조의 잔유물들을 없애버리는 방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담양에 소재한 수북·수남학구당(水北·水南學求堂)은 새로운 사회질서에 맞는 형태로 바뀌었던 유적이라는 점에서 당시 정치·사회적 면모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18개 성씨들이 관리하고 있는 이 당(堂)은 최근 주변에 축사(畜舍)가 늘어서고 있어 못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조선 학동들의 청아한 글 읽는 소리 대신, 짐승들의 울부짖음만이 고막을 휘젖고 있어 간간히 찾는 길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i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