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날던 봉황이 보금자리에 들어 알을 품는‘명당’

화이트보스 2009. 1. 15. 13:53

[풍수기행]날던 봉황이 보금자리에 들어 알을 품는‘명당’

[풍수기행]<16> 명문가를 일으켜세운 烈女 - 光山金氏중흥터전 일군 양천 許氏부인(하)


 


광산 김씨 시조인 김흥광이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지냈는데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그에게 광산 부원군에 봉하자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천마시풍형의 대지명당에서 눈에 들어오는 보국(保局·혈터를 감싸 옹위하는 형국)은 참으로 크고도 넓을뿐 아니라 그 짜임새 또한 유정(有情)하기 짝이 없다.

청룡의 기세가 강하고 백호는 가깝게 여러겹으로 감싸 주고 있으며 멀리 건지산(300m) 연봉들이 문필봉, 귀인봉, 천마사 등 귀한 봉우리(沙)들이 이곳 묘터를 중심으로 나열하고 있다. 또 혈터의 앞마당이라할 내외명당 역시 평탄하면서도 원만하다.

청룡 백호의 여러 분지맥(分枝脈)에서 나오는 물길이 혈 주위에서 빠져 나오고 골육수와 합수돼 한 곳으로 빠져나가니, 말 그대로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4과, 즉 용, 혈, 사(砂), 수가 조합합국된 명혈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이곳 천하대지에도 몇가지 흠이 있어 보인다.

백호쪽 두번째 능선이 혈을 다정하게 抱하지 않고 암석으로 된 그 끝부분이 묘터를 찌르듯 향하고 있고, 안산이 뚜렷하지 않으면서 좀 거칠어 보이는 등 미미한 결점을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묘터를 만들려는 뒷 주산과 현무봉이 강룡(强龍)인데다 그 기세를 배경으로 삼아 응결된 혈처가 적중돼 가장 중요한 ‘龍眞穴的’을 충족시켰으니 흠이 凶禍로서 작용하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풍수지리학의 원전이라 할 청오경(靑烏經)의 용호편에서도 ‘혈이 진국이면 청룡과 백호는 살(殺)이 같이 보여도 자연국(묘터)을 보호해 주고…’ 라고 쓴 것을 다시금 음미해 보면 그 의미가 확실해 진다.

묘터 앞의 내명당에 모아진 물줄기는 묘터를 다정하게 감싸고 돌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우선수로 흘러 횡대수를 이루며 내청룡의 끝자락인 을진(乙辰) 방위로 빠져나가는 파(破·수구)가 되니, 묘소의 좌향을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설정했다.

이 경우 좌선룡에 우선수이면 음덕을 입은 후손들이 부귀수고(富貴壽高)하며 인정창성(人丁昌盛)하는 합법이라 했다.

이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박씨 3형제가 있었는데 그들 모두 풍수지리학에 깊은 연구를 해서 명지사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각자 자신들이 죽으면 묻힐 신후지지를 잡았는데 큰 형은 위에 소개된 순창군 인계면 말 명당(천마시풍형)을 잡았고, 둘재는 임실 갈담의 잉어명당을 잡았으며 셋째는 임실 가실마을 앞쪽의 금계포란형(금빛 나는 닭이 알을 품은 모습)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림1중앙#

그런데 큰 형 박 감찰에게는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지내줄 아들이 없으므로 사위인 김극뉴에게 자신의 신후지지를 양보하고 자신은 부인과 함께 혈 위 부분인 뇌두부위에 묻혔다고 한다. 그의 예견대로 광산 김씨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러 오면 꼭 박씨 산소에 먼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반면 함양 박씨 문중에서는 “이렇게 큰 길지를 조카에게라도 줬으면 광산 김씨들이 누린 복을 자신의 문중이 누렸을텐데…”라며 못내 아쉬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널리 알려진 일명 말 명당은 그 유명세 만큼이나 웬만한 풍수지리학의 도서에 소개돼 있어, 실제 이곳을 답산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알 만큼 알고 있다.

조선 8대 명당인 천마시풍형의 대혈에서 영향을 입은 탓일까. 광산 김씨는 조선조에만 정승 5명을 비롯 대제학 7명, 왕비 1명(숙종의 비 인경왕후), 문과급제자 253명을 배출했다.

본 사례는 당초 열녀 양천 허씨 부인의 정절과 그와 연관된 후손 김극뉴의 산소에 의해 명문의 맥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킨 내용으로 엮어 한정키로 했다.

그러나 광산 김씨의 연원을 따라 올라가면 그 시조와 관련된 양택명당과 본관이 전남지역에 소재하므로 언젠가 다시 소개할 필요가 있는 까닭에 이번회에 마저 소개할까 한다.

광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왕자 김흥광이다. 신라말 곳곳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각 지방 호족들이 자웅을 겨룰때 신라의 멸망을 예견한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 서일동에 피란, 은거했다.

김흥광이 신라 국가 사직의 위태로움을 느껴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지냈는데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그에게 광산 부원군에 봉하자 후손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조 후손 가운데 8명의 평장사가 배출되자 사람들이 그 곳을 평장동이라고 부르게 돼 자연히 마을이름이 됐다는 것이다. 평장동이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즉 날던 봉황새가 보금자리에 들어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대명당으로 알려지면서 부터 원근 각처에서 지사들은 물론 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명소가 되고 있다.

평장동의 양택명당의 본원을 살펴보면 그 명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호남정맥이 담양 추월산으로 넘어가기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에서 한 맥을 남으로 뻗어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와 월평리를 돌아 바심재를 넘고 용구산, 병풍산, 그리고 대치를 지나 병봉산을 세웠다. 이 병봉산에서 출발한 산맥은 진원면 불태산으로 가지전 중간쯤에서 단아한 주산을 세운 다음, 이 중출맥으로 내려온 용맥의 기지맥지의 서기어린 곳에 광산 김씨 시조 김흥광의 壇이 있다.

김흥광의 묘가 失傳돼 알수 없기 때문에 처음 정착해 살았던 곳에 단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이 보기드문 명당이고 보면 실제 시조 김흥광의 체백도 이곳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그 후손들이나 풍수연구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쯤해서 세가지 사례 즉 풍수지리와 열녀를 관련지었던 풍수기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정보자료와 문헌적 소재 수집에 따른 애로와 차이 때문에 내용의 구성과 장단에 차이가 났음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길고 짧음이나 구성에 관계없이 3가지 사례에 깃들어 있는 주제는 한 여성의 자기헌신과 올곧은 삶의 행적으로 인해 시가의 명맥을 유지함은 물론 문중을 명문가로 우뚝 서게 한 미담에 귀결되고 있다. 여기서 큰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풍수지리와 열녀의 사례는 그냥 흥미삼아 읽고 지나칠 소재가 아니라 조상의 중요함과 역사속에서 비껴가기 쉬운 숭조사상과 아울러 다른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집안의 뿌리를 다시금 되새겨 파악하는 동기를 일깨우고 개인과 가문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한 구석이 밝아지는 것은 곧 온 세상을 밝게 만드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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