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큰 배가 바다로 출항하는 형국 … 컨테이너 부두 개항

화이트보스 2009. 1. 15. 14:07

[풍수기행]큰 배가 바다로 출항하는 형국 … 컨테이너 부두 개항

<18> 선대의 혜안이 예지한 땅 -弘船出海形의 명당 광양 하포땅


 


[풍수기행 ]<17>선대의 풍수지리적 혜안이 예지한 땅- 弘船出海形의 명당 광양 하포



컨테이너부두가 건설된 곳이 바로 광양시 골약리 하포마을의 해안지역이다.

조선 영조때 문신으로 그 활약상이 제일갔던 어사 박문수가 전국을 돌아보고 나서 가장 살기 좋은 땅으로 “조선중에서도 전라도요, 전라도 중에서 광양이요, 광양중에서도 골약”이라고 손꼽기도 했다.

골약면 하포마을은 복된 땅으로 알려졌지만 풍수가에서는 홍선출해형(弘船出海形)의 명당대지가 있는 길지로도 널리 알려진 땅이다.

홍선출해형이란 한자 풀이대로, ‘매우 큰 배가 바다로 나아가는 형국’을 뜻한다. 다른 결록을 보면 홍범출항형(紅帆出航形)이라고 기록돼 전해져 온다. 즉, 하포마을 동쪽에서 서쪽해안으로 이르는 형국이 마치 붉은 범섬이 빠져나가는 모양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홍선출해형으로 더 유명하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큰 배를 지칭하는 말로는 거선은 표기돼 있지만 홍선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 선현들은 거선출해형이라 하지 않고 왜 홍선출해형이라 했을까.

굳이 한자의 전문적인 해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홍선은 매우 큰 배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는 뜻이 함축돼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으며 또 짐작하게 해준다.

이렇듯 명당길지가 간직된 땅이라고 알려진 골약의 하포지역에는 내로라 하는 풍수연구가들이 선영을 길지에 모시려는 사람들과 함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필자 역시 하포와는 매우 깊은 인연을 맺어왔던터라 항상 잊지 않고 있는 곳이다.

3년전까지만 해도 평촌마을 인근 뱃등이라 불리우는 곳에 필자의 증조부모 산소가 있었다.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1년전인 1939년의 일이다. 당시 명지관으로 동부 6군에서 널리 인정받아 명성이 자자했던 김오산 선생의 안내와 소점(所占)에 따라 증조부모 산소를 이른바 홍선출해형의 명당에 썼던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멀고도 낯선곳까지 찾아와 홍선출해형의 명당이 소재한 땅을 비싼 값으로 매입해 선영을 모시고, 정성을 다해 온 선친의 집념에 대해 마음으로 부터 경의를 표하곤했다. 그 오지의 허름한 땅을 구하기 위해 문전옥답을 팔았던 일은 당시의 사회적 인식으론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칠때마다 증조부모 산소를 점혈해준 그 지관도 신뢰했다. 그 곳에 모신 증조부모님의 발음에 의해 그 대지명혈 만큼 가문의 번성이 기약되리라는 부친의 확신 또한 컸다고 볼 수 있다.

구례에서 족히 하루해가 걸려야 성묘를 할 수 있는 그 곳에 도착해 참배를 마치고 나면 함께 간 형제들을 벌안 잔디밭에 앉혀 놓고, 매양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뇌리에 새겨진 홍선출해형의 명혈을 설명해주던 그 때 기억들이 선고의 모습과 겹쳐서 아련히 떠오른다.

묘소의 진산이 되는 구봉산(본명 구봉화산)의 수려한 기상이며 거기서 뻗어 내려온 래용맥이 증조부모 산소에 이르러 기지맥지(氣止脈止·용맥은 마무리되고 기세도 마무리됨)된 곳이 증조부모 산소라는 설명을 듣기도 했다.

또 혈전에 펼쳐진 바다를 가리키며 해안 가까이의 바다에 떠 있듯이 자리잡고 있는 매우 작은섬이 다름아닌 항해하는 배에 필수 도구인 닻과 같은 형국의 닻섬이며 그 보다 더 멀리 보이는 산이 묘도(고양이 모습과도 흡사한 여수시 소재 섬)에서 안아주니, 천혜의 명당이라는 것을 강조해 인식시켜 주곤했다. 다시 강조하기를 어떤일이 있어도 이 산소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잘 지키도록 당부했던 것이 어제인 듯 싶다.

사실 증조부모 산소 뿐만 아니라 마치 공동묘지라도 방불케 할 정도로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었던 묘소들을 보면서 과연 어느 산소가 정혈에 들어선 것일지를 몹시 궁금해 하던 것은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뒤 였다.

그 산소의 당주 하나 하나에게 확인해 보면 모두가 각자의 선영이 홍선출해형의 진혈에 자리잡았다고 할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림1중앙#

그런데 부친의 유언과 당부를 어기고 증조부모 산소를 여 천시 마산면 회룡고조형으로 이장한 때가 바로 3년전의 일이다.

필자가 풍수지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미흡한대로 연구에 몰두한 뒤, 그 곳 산소가 진혈이 아니라 가국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 것은 선고가 타계한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허혈에 선영을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돌아가신 선친의 뜻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급기야 집안 어른들과 상의해 이장을 결행했던 것이다.

이장을 결심하면서 마치 선고에게 큰 죄를 짓는 것 처럼 마음이 무겁기만했다.

그러나 이장 과정에서 증조부모의 체백과 파묘자리의 상태로 봐(목염과 충염이 만연됨) 타계한 부친도 더 안심하고 기뻐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듯 명풍수로 이름났던 그 지사가 형기론에만 치우친 나머지 전혀 교구통맥법과 재혈법을 깊히 고려치 않아 회의와 원망마저 느꼈다.

증조부모 산소를 옮기던 날, “구례의 어른이 만나 먼 이곳까지 몇번을 내왕하면서 뱃등의 명당을 찾아 쓴 선영을 지키지 못하고 고인(필자의 부친)의 뜻을 어기고 함부로 이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산소지기를 비롯한 동네사람들의 쑥덕거림을 등뒤로 듣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곳은 음택 명당이 저리잡아서 홍선출해형의 명당터로 알려진 곳이 아니라 수백년전에 어느 이인(異人) 이나 풍수지리에 도가 트인 선현이 훗날 큰 배가 드나드는 항구, 즉 컨테이너 부두가 들어설 것을 예언했던 예지력이 잘못 전해져 명당의 묘터인 홍선출해로 확대 해석했을 것이고, 선친도 그 맥락에 연계돼 이곳까지 증조부모 산소를 썼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물론 지금도 건설의 힘찬 망치소리가 끊이지 않고 확장되는 해안의 컨테이너 부두를 굽어보며, 후중하고 수려하게 솟아 있는 구봉화산의 형세로 봐서 그 주산 아래 어딘가에 예사롭지 않은 명당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갖게 하지만 그 곳 어디에도 배와 관련 있는 산이나 지형적 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풍수지리의 명당에 가끔씩 들먹여지는 行舟形이나 行舟山, 그리고 황룡부주형(黃龍負舟形) 등 배나 바다와 관련된 형국은 물론 선대의 결록도 찾아 보기 어렵다.

홍선출해, 매우 큰 매가 바다로 출항하는 형국의 명당이 있음을 암시하는 이 신비한 예언에 숨겨진 선현의 예지력에서 나온 예언성 명혈은 흔히 말하는 음양택의 명당의 이름과 연된 것이 아니다. 이곳을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구조적으로 간찰한 선대의 형안이 현대적인 과학의 맥락에서 분석해 보지도 않고, 그리고 수심이 70m가 넘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포구라는 것을 실증해 보지도 않고, 언젠가는 이곳에 후대들이 항구를 건설해 이용할 것을 예견한 그 혜안에 다시한번 경탄과 경의를 표한다. 풍수지리학은 단순히 집터와 묘터를 길지에 정해 생전이나 사후에 발복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부터 하늘이 점지해준 아름다운 강토를 더 크고 더 넓고 더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공익성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하포 땅에서 동쪽으로 손에 잡힐 듯 건너다 보이는 광양제철소에서 연신 뿜어져 오르는 하얀 연기를 바라보면서 그 곳에 제철소가 들어설 것을 수백년전에 미리 예견해서 쇠섬이라 이름 붙여진 그 조그만 섬쪽으로 발길을 옮겨갈까 한다.




[ 기사 목록으로 ]     [ 프린트 서비스 ]      [ 메일로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