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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도시·호수 들어설 예언 적중‘감탄’

화이트보스 2009. 1. 15. 16:04

[풍수기행]혁신도시·호수 들어설 예언 적중‘감탄’

<24> 선대의 혜안이 예지한 땅-나주 신도리·영암 삼호


 






당초 계획대로라면 삼호의 예언성 지명을 살펴봐야 할 차례다.

그러나 답산 과정에서 중앙정부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는 혁신도시의 예정지가 나주 산포면 신도리(新道里) 일대에 자리잡게 되면서 삼호와 이곳을 함께 다루기로 했다.

먼저 신도리를 직역하자면 새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또 道단위 행정구역 정도의 새로운 도시가 확충된다는 뜻도 포함됐다고 본다. 흔히 한 나라의 수도는 가장 큰 태조산에서 뻗어 내려온 큰 산줄기의 끝자락에 넓게 자리잡은 양택지에 형성된다. 그 보다 규모가 작은 용맥의 끝자락에는 일반적인 도시가 형성되고, 점점 규모가 작은 산맥과 대지의 넓이에 읍소재지와 마을이 들어선다. 음택의 규모 역시 그 혈을 짓는 후룡에 따라 결정되어 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음·양택의 적지를 따지는 요소중 가장 큰 요인은 집터는 현실생활에 따르는 요건들이 잘 갖춰진 땅이어야 하고 묘터는 땅에 묻힌 체백이 잘 보존돼 그 기감이 후손에 감응될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신도리를 중심으로 이 지역이 어떤 지리적 요건을 갖췄기에 혁신도시가 들어선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도(道)라는 행정구역을 도입해 쓰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 14년(995)때 부터라고 한다.

고려때 지금의 광주·전남을 강남도(江南道), 해양도(海陽道) 등으로 나눠 불렀는데 현종 9년(1018)에 2개도를 대표하는 고을인 전주와 나주의 첫머리를 따서 전라도라는 명칭을 갖게 된다.

#그림1중앙#

역사적으로 봐도 신도리의 모태가 되는 땅 나주는 남도의 중심이면서 대표성을 지닌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도청 소재지가 무안 남악으로 갔지만 그에 버금가는 혁신도시로 확정됐으니, 역사성에 입각해서도 신도리의 예언성 지명이 지어지게 된 유래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

나주 혁신도시 구역과 그 중심축이 되는 신도리까지는 무등산으로부터 어떻게 발달했느냐가 중요하다.

혁신도시로 확정된 곳의 후룡은 발달해온 상태가 참 특이하다. 워낙 전문적인 내용이라 여기서 다 설명할 수 없으나 어쨌든 무등산에서 대간룡이 화순방면으로 낙맥한 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산포면과 다도면 경계지점에 이르러 마침내 혁신도시를 품에 안을 수 있는 분지의 구릉맥을 형성한다. 그리고 신도리를 중심으로 서남방에 태봉산, 남방에 봉황산, 동남방에 건지산, 동방에 식산, 북방에 이름 그대로 야산을 나성(羅城·혈을 중심으로 4방8방으로 성으로 에워싸 혈을 품에 안아 주 듯 병열한 산세)으로 삼고 있다. 쉽게 말해 무등산에서 남향으로 200리도 넘게 줄기차게 뻗어내린 용맥이 다시 북방쪽으로 역세의 행룡을 거듭하다가 남평의 지석천 및 영산강에 둘러싸인 산포의 드넓은 땅 중심에 위치한 신도리에서 그 길고 긴 내룡(來龍)의 여정을 마무리 한다. 평야를 적시는 강줄기가 북상해온 용맥과 서로 배합하며 조화합국을 이루는 땅인 신도리 일대를 오른쪽에서 에워싸는 식산의 산줄기가 남평읍까지 큰 울타리를 치듯이 북상하는 형세도 예사롭지 않다.

이런 역사성과 지리적 요건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서 옛적에 신도리라고 이름지어 오늘날 혁신도시가 들어설 것을 예언한 선대의 예지력에 또 한번 감탄하면서 무안 일로땅을 거쳐 삼호로 향했다.

영산호와 영암호, 그리고 최근에 축조된 화원방조제로 새로 생긴 금호호에 둘러싸여 지명이 말 그대로 큰 호수 3개의 중심에 놓인 신비의 땅 삼호에 도착했다. 3개 호수중 금호호는 삼호읍과는 공간적으로 너무 멀고 목포만이 삼호읍을 포옹하고 있다.

#그림2중앙#

삼호에 관한 기록중 고작해야 용당리 가지도(可之島)에 군왕지지의 대혈이 있다는 일지스님의 결록이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실제 간산 결과 현대조선소가 건립되면서 백호 자락이 파괴된 까닭에 하늘이 점지한 명혈은 아닌 듯 싶다.

오히려 용당리와 삼포리 경계에 있는 100m 높이의 갈마산에 자리잡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의 음택명당이 보였다. 특히 삼호의 조종산이라 할 수 있는 호등산에서 내룡행도해 용두마을뒤에 문천무만의 대지를 작혈, 이른바 와룡청수형(누워있는 용이 물소리를 듣는 형국)이라 이름 붙여진 음택 겸 양택명당이 명혈로 보이면서 물(水) 즉, 삼호와 연관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음·양택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혈인데다 규모나 형세로 봐 큰 호수와 관련지을 만큼 천장지비의 대지가 아니었다. 삼호의 풍수지리학적 특징은 규모나 성봉의 강세를 자랑하는 월출산 천왕봉에서 발원해 향로봉, 월각산, 별묘산으로 어어지면서 강진군과 경계를 이루다가 좌선해 해남군과 경계를 형성하는 가학산, 흑석산에 이르러 528m로 낮아져 부드럽고 아름답게 변환된 후 영암 미암면 일대를 통과한다. 이 과정에서 수십궐의 용맥이 드디어 삼호면 접경에 당도한 연후에 다시 평양맥으로 꿈틀거리며 영산호와 영암호를 잇는 운하에 이르러 잠룡과협한 뒤 크게 비룡, 예의 호등산을 우뚝 일으켜 세운다.

그러니까 조악하고 기세가 왕성하며 화기에 찬 월출산의 지기가 삼호반도에 이르러 서기로 바뀌면서 그 생왕한 지기가 삼호반도에 감돌아 서리니, 삼호는 단순히 3면이 물로 싸여있는 땅이 아니다. 서기가 어린 땅으로 바꿔져서 날로 번창을 기약하므로써 축복받는 땅으로 발전되는 양택(산업체 등 기번시설이 들어섬)이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삼호 주위에 물이 머무는 호수가 구축되지 않고 영산강의 물줄기와 영암호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바다로 빠져 나가면 삼호땅에 서리는 월출산의 지기는 물길 즉, ‘시누스’를 따라 훑어내려 바다로 유실되고 말 것이다. 또 서기없는 공허한 땅은 자칫 불모지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옛 선각자는 월출산의 명기어린 지기를 담고 흐르는 한줄기 큰 용맥이 삼호에서 매조지를 하게 될 것이며 그 운기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미리내다 보고, 때를 맞춰 삼호 주위에 지기를 안아서 새어나지 않게 할 호수가 들어설 것임을 예지해서 삼호라는 예언성 지명을 지어서 전해졌을 것이다. 땅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후대를 배려하는 선대의 깊은 뜻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동안 선대가 예언해 현실로 밝혀진 예지의 땅을 독자들과 함께 밟아왔다. 땅은 인간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생명을 같이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줬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후대를 위해 어떤 예언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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