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좋은일 많이해 명혈로 친산, 승승장구한 李棹”
<55> 현몽과 적덕에 의한 명혈득지(5) 선행의 공적으로 친산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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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풍수기행은 전의이씨(全義 李氏) 시조인 이도(李棹)가 평소 선행을 베풀어 그 공덕에 의해 부친산소를 명혈에 안장해 훗날 자신은 고려창건의 공신에 이어 태사의 자리에 오른 사례를 소개한다.
전의 이씨 하면 조선 숙종때 이상진을 배출케 한 모악산 아래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장파마을 후산에 쓰여진 비천오공혈(지네가 하늘로 날아 오르는 형국의 명당)을 먼저 떠 올린다. 그러나 이는 전의 이씨가 한창 번성하던 조선시대 명당발복 이야기이고 그 이전에 이렇듯 번창일로에 오르게한 후삼국시대와 고려때에 걸쳐 있었던 명혈대지를 얻게 된 사연이다.
이도의 친산은 충남 공주시 동쪽 끝지점에 자리한 홍수통제소의 우측산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 금강의 곰나룻터가 있어 금강을 건너 지금의 쌍신동과 월성동에서 금성동으로 통하는 뱃길이 이어진 곳이다.
이곳에 이도가 그의 부친 산소를 쓰게된 것은 평소 다져온 선대와 이도의 후덕한 덕성에 바탕을 둔 적덕에서 비롯됐다.
이도와 그 조상은 일찍이 금강 곰나룻터에서 뱃사공을 업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무던히도 사람좋기로 소문난 선조와 이도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공주일대 굶주린 사람들은 그를 부모처럼 의지하며 따랐다.
당시만해도 걸식을 하고 다닌 거지들이 득실거리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후삼국이 분열된 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때 였으므로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워 초근목피로 연명할 만큼 가난에 찌들어 이도의 구휼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대체로 뱃사공은 숱한 사람을 마주치는 직업적 특성상 인정머리가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도는 공주일대에서는 가슴이 넓고 뜨거운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뱃사공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도에게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인연이 찾아오게 된다.
어느날 한 스님이 나룻터를 찾아와 이도에게 금강 건너편에 가야할 바쁜일이 있으니 독선( 혼자 타는 배)으로 건네 주기를 청했다.
그런데 나룻배가 강을 건너 강변 언덕에 닿자 그 스님이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오던 길로 가야 되니 내쳐 다시 건너 달라”고 말했다.
이도는 그냥 웃으면서 불평없이 건네주자 스님은 또다시 건너편으로 가기를 요구했다. 보통 뱃사공 같았으면 불평이 쏟아졌겠지만 이도는 이내 스님의 주문에 선선히 응했다.
이런 이도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던 스님이 “상중이냐”고 물었다.
이도가 “그렇다”고 대답한후 3년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부친은 운명하기 직전 “내가 죽으면 우선 가매장한 뒤 산주인이 나타나면 그에게 물어 영구지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이도에게 스님이 다시 “작고한 부친의 장사할 곳은 정해졌느냐”고 물었다. 이도는 선친의 유언을 전해준 후 “대대로 내려온 선산땅인데 어찌 산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산주인이 나타날지도 의문이다”고 말했다.
스님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내가 산주인이요”라고 말했다. 불가에 들어오기전 속성이 최(崔·파자하면 산주인이 됨)씨 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내 건너편에 빤히 보이는 산허리를 가리키면서 “저기 돌참나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선친의 묘를 이장해 모실 자리이니 모일모시에 이장”하라고 일러줬다. 그리고 좌·향과 천광의 깊이까지 세세히 알려주고 명심해야 할 몇가지 사항도 덧붙였다.
스님은 또 “훗날 누군가 와 그 산소자리가 흉지라며 이장해야 할 것이라고 유혹할 것이니 반드시 백회 100포를 부어 다져 봉분을 짓고 이 글을 돌에 새겨 봉분의 윗부분쯤에 묻으라”고 당부까지 했다.
스님이 써 준 글은 ‘…南來妖師 朴相來 單知一色未知 萬代榮華之地(남쪽에서 요사스런 지관 박상래가 찾아와 이곳이 좋지 않은 묘터이니 이장할 것을 권할 것인 즉 그의 말을 듣지 않아야 만대의 영화가 이어진다)’ 였다.
이도는 스님이 말해준대로 선친의 묘소를 이장했다.
이장하던 날 공주일대 거지들이 달려와 일을 도왔다.
이것은 일본의 무라야마지준이 쓴 ‘조선풍수’에 소개된 내용이다.
산소를 쓰고나서 이도는 일취월장 승차해 뱃사공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조정에 진출해 1품의 반열에 올라 태사 벼슬까지 지내고 역사적 인물로 거듭났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게된 내역은 이렇다.
당시 후고구려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위해 후백제 정벌에 나섰지만 공주 금강에 이르러 큰 홍수를 만나 병사들이 강을 건너기가 어려워 전략에 차질을 빚었다. 이때 이도가 나서 곰나룻터를 지켜온 경험을 살려 무사히 병사들을 강건너까지 건널수 있도록 도와 후백제 정벌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왕건은 그에게 도(棹·배의 노를 뜻함)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고려 창건의 공신반열에 오르게하고 조정에서 국사에 임하게 돼 마침내 태사 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스님의 말대로 이도의 집안은 부귀하고 대대손손 영달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스님의 예언대로 박상래라는 지관이 이도의 친산을 둘러보고 이도의 후손에게 입김을 넣었다.
박상래의 으름장이 워낙 거세 후손들은 봉분을 파헤쳤다. 백회 100포를 부었으니 쉽게 파헤쳐질리 만무했다. 일꾼들이 겨우 윗 봉분을 깨트리자 예의 글이 새겨진 지석이 나왔다. 너무나 놀란 후손들이 곧바로 산일을 중단했다. 법대라면 요사스런 지관을 혼내줬겠지만 선대의 유훈대로 선덕을 배풀기로 결정하고 얼마간의 노자를 주고 다시는 금강변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필자도 이도의 친산을 세번에 걸쳐 찾아가 꼼꼼히 살펴봤다.
특히 묘소 아래 재실 윗쪽에 진양각을 따로 세워 스님의 은공을 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이야기가 전혀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동국여지승람 ‘전의 인물조’에 이도의 소전이 실려 있다는 문헌을 접하고 더욱 확신할 수 있다.
금강이 마치 발밑에 흘러가는 이도의 선친 산소에 서서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 자기안산과 금강 건너편에 마치 조배하 듯 나열한 조산들의 수려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적덕에 얽힌 명혈득지의 전설같은 이야기도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 스님도 이도와 선대의 공덕을 전해들었을 것이고 또한 이도의 선친도 생전에 풍수지리에 밝은 스님에게 한번쯤 자신의 장지에 관한 통사정을 했을 것이다. 이도의 사람됨을 살펴본 기회를 갖게된 스님이 적덕과 풍수지리의 참된 인연을 맺게 했을 것이다.
선덕과 공덕을 쌓으면 언젠가 은혜로움으로 이어진다는 교훈을 후세에 심어주고 있는 공주 일우의 이도 친산앞에 서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음회는 후대를 위한 살신성인의 위선사를 소개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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