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虎傷 각오하고 명당얻어 쓴 희생정신 돋보여”

화이트보스 2009. 1. 21. 15:47

[풍수기행]“虎傷 각오하고 명당얻어 쓴 희생정신 돋보여”

<56> 후손위한 살신성인의 위선사 (1) - 자기 희생 각오로 얻어 쓴 맹호출림형


 




풍수지리와 관련돼 전해오는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필자가 풍수기행을 1년 넘게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풍수지리학이 지니고 있는 학문적 본질을 바르게 전달하려는 점이다. 또 하나 우리 정신문화유산의 큰 뿌리를 간직하고 있는 숭조사상을 계승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찾아 안정과 평화스런 생활의 기조를 다지려는데 그 참 뜻이 있다.

십 수년전 독일의 저명한 인류학자는 “6·25 전란과 같은 참혹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왜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인구가 극소수에 그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한국 국민이 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의 사회통합적인 정신문화를 견지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진적이 있다. 이 학자는 이를 분석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국내에 오랜기간 체류한 뒤 나름대로 비교적 설득력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연구 결과에서 밝혀진 해답은 두가지 였다. 하나는, 전쟁과 빈곤의 혼란 속에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신질환자가 적은 것은, 한국 어머니들의 헌신적이고도 위대한 모성애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 실제 육아수단의 하나인 유모차 대신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게 하는 것과 어떤 곳이든 업고 있던 아이를 앞쪽으로 돌려 젖무덤을 노출시켜 모유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정신적 동질감 속에서 응결된 사회통합을 이루는 요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식, 추석 등 명절을 맞아 온 국민이 스스로 고향을 방문, 정신적 뿌리를 함께 확인하며 멀고 가까운 거리를 가리지 않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큰 절을 올리면서 부모형제간의 우애와 조상숭배의 정신을 일깨우고 다짐하는 것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그렇다. 이 학자의 연구결과가 아니어도 우리 국민은 자식을 위해서는 부모의 모든 것을 내 놓는 ‘위대한 자녀사랑’의 정신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런 정신의 한 단면을 조명해 주는 이야기가 바로 풍수지리의 명당 득지에 얽히면서 계속 전해오고 있다. 선대의 안혼영백과 후손이 잘 되는 일이라면 자기희생 쯤은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풍수기행은 우리 조상들의 살신성인의 각오로 명혈길지를 얻어 쓴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 보고자 한다.

믿기지 않는 인연으로 한 지사(지관)를 만나 ‘맹호출림형’의 대길지를 얻어 선친 붕한(鵬翰)공의 묘소를 이장하고 본인은 장사 당일 호상(호랑이에게 화를 당함)을 입었던 인동 장씨(仁同 張氏) 우천씨의 사례다.

조선 순조(1790~1834) 때 전라도 금구 완평땅에 김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다. 그 부잣집에는 옥산에서 온 장우천씨가 집사를 맡아 근면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며 함께 살고 있었다. 김 부잣집에는 멀리서 찾아 온 꽤나 이름있는 지사가 사랑방을 차지한 채 김 부자의 소망이었던 명혈대지의 명당을 찾아주기 위해 날마다 산행을 일삼았다. 그러기를 10년이 넘었다. 장씨도 때로는 여장을 챙겨 그 지관을 따라 명당이 있을만한 곳을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장씨는 “수년 전에 고생만 하다 타계한 선친의 산소를 영구지지에 모실 수 있을 것인가”하고 탄식하며 김 부잣집의 위선사가 못내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명당을 찾으러 나간지 보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겼던 그 지관이 희색이 만면해서 돌아왔다. 곧바로 주인 김씨를 찾아가 “비로소 10년 동안 공들였던 보람을 찾았소. 호랑이가 숲속에서 뛰쳐 나온다는 ‘맹호출림형’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큰 명당에도 ‘이장한 뒤에 장자가 호랑이에게 흉화를 당하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그 지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씨는 “10년이나 뒷바라지 해 주었더니 겨우 내놓은 구산 결과가 내가 호상을 당할 자리라니, 배은망덕한 사람 같으니” 라고 호통친 후 그 지관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때 마침 마당을 쓸다가 우연히 방안에서 들려 온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장씨는 지관을 동구 밖까지 따라갔다.

장씨는 “지사님 우리 주인은 싫다고 하는 명당이요. 제 동생과 아들에게 10년이 걸려서라도 그 공을 갚을 터이니 그 묘자리를 제게 소점해 주시요”라고 통사정했다.

장씨의 소청이 간절한데다 후손을 위해 자기의 목숨 바치겠다는 ‘살신성인’의 각오가 워낙 단호한지라, 큰 감동을 받은 지관은 장씨에게 그 자리를 일러 줬다.

장씨는 가족들에게 전후사정을 비밀에 부친 후 동생과 아들을 불러 “주인집에 오래 묵은 지사에게 성심을 다해 뒷바라지 한 보람이 헛되지 않아 분에 넘친 대지명당에 부친산소를 쓰게 됐으니 후일 그 지사에게 보은하라”고 마치 유언과 같은 말로 당부했다.

과연 장사 지낸 날 밤에 장자인 장씨는 호상을 당했다. 후손들은 선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열과 성을 기울여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이웃의 칭송을 받으면서 전북 김제의 향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5대손 장익수는 고종 때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해방후 9대손인 장현식은 전북도지사, 7대손 또한 부안군수를 지냈다.

필자는 이 산소에 깃든 고귀한 뜻을 기리고, 호상을 당한 연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해 이번 가을에 그 곳을 방문했다. 주산부터 샅샅이 심룡을 시도했다. 굳이 미치지 못한 간산 능력을 무릅쓰고 외람되게 간산평을 한다면, 장자의 호상(또다른 변고 일 수도 있음) 이유는 호랑이가 먹이로 여긴다는 퇴육사가 없었는데 일각에서는 퇴육사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장 확인 결과 우선룡의 이태교구의 작혈로서 용진혈적 대지가 분명했다. 그러나 ‘기룡혈’의 형세를 갖춰 자기안산(自己案山·혈을 형성한 용맥의 여기가 앞으로 나아가 안산을 갖추는 특색있는 보국)을 두고 있어 설사 ‘퇴육사’가 있어도 혈에서 보이지 않는 이른바 ‘암공사’로 있게 되므로, 타당한 이유로 볼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선룡의 마무리 용맥인 혈입수가 을맥(乙脈·동동남으로 진행하는 맥)이 아니고, 묘입수(卯入首·동남남으로 행도하는 혈장의 입수)로서, 풍수학교전인 청오경에 쓰인대로 가지론 중의 ‘수가(首假)’인 점이 발견돼 ‘청오경’에서 이른대로 장자 패절의 변을 당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큰 자리일 수록 소흉이 따른다’ 했던가. 이는 ‘대통령의 생가터와 선영’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인간에게 군자의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의 양면이 있듯 모든 지혈에도 성인지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음양의 살기가 뒤섞여 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스러울 수 없는 법이다. 흉살을 암시해도 선대의 영면과 후손의 번성을 위해 자기희생을 서슴없이 받아들인 장씨의 살신성인 정신에 옷깃을 여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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