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아우 희생 감수하고 명당에 부친모셔 후손들 부귀영화”

화이트보스 2009. 1. 21. 16:03

[풍수기행]“아우 희생 감수하고 명당에 부친모셔 후손들 부귀영화”

<58> 후손 위한 살신성인의 위선사 (3) 아우 운명이 바꾸고 후손 번성한 사례


 






전북 순창군은 명혈대지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명당만도 서너군데에 이른다. 穴처는 남원땅에 소재하지만, 그 名穴을 짓기 위한 본원의 조종산은 순창군 동계면의 풍악산에서 비롯된 이른바 ‘흥곡단풍형’의 대지로 인해 황희 정승이 배출됐다는 명당을 비롯, 광산김씨를 일약 국내 유수한 문벌로 번창했다는 ‘천마시풍형’의 국중 8대명당, 그리고 이씨 부인의 신념과 후손을 위한 헌신적 노력으로 남원 양씨를 명문가로 일으켜 세운 구미리의 ‘갈록음수형’등이 그 것이다.

이 밖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당대지가 이미 주인을 만나기도 하고, 혹은 비밀스런 모습을 감추고 주인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 가운데 장후에 직계 후손의 희생을 예지하고도 선대의 안혼영백과 후손의 발복을 위해 아우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선대를 명당대지에 안장한 극적인 사례를 소개 한다. 전북 순창군 궁계면 내령리 영계촌 동쪽산 언덕에 자리잡은 ‘오공비천형’에 승지공 이혼(李渾)의 산소가 있다.

이 산소 역시 굳이 물형을 이르면 ‘지네가 하늘로 비상하는 형국’ 이라고 해서 ‘오공비천형’이다.

이 명혈에 영민하고 있는 승지공 이혼은 슬하에 두 하들을 두었는데, 장남 금헌(琴軒) 이대윤은 선조 무오년에 사마에 올랐으며, 을유년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수찬 예조정랑을 끝으로 남원의 동쪽 고을 지금의 임실군 둔덕으로 지맥기운을 따라 내려왔다. 공은 문장과 행의를 겸비한데다 풍수지리학에도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자 공은 추성회맹에서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공은 도유사겸 모량장으로 추대됐다.

권율과 김성일의 추천에 의해 임금으로 부터 의병 상호군을 특별 제수 받았다. 공은 선산전투에서 병을 얻어 병신년(1596년)에 운명한다. 임금은 이후 ‘예조참판’의 증직을 내렸고,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그의 아들도 벼슬길에 올라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리고 이혼의 둘째 아들은 어모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년전 부친 승지공이 작고했다. 탈상 3년후 예조정란 대윤의 아우 어모장군이 그의 형에게 말하기를 “형님께서 효자이고 지리에 통달하신 분인데 어찌 선고의 면례를 미루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형은 “폐백천냥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아우 어모장군의 처가는 풍천 노씨 집안으로 갑부였다. 노씨 부인은 혼인한 지 1년째 부터 3년을 기약하고, 친정에 가서 수시로 사가로 송금을 했다. 3년이 되던 해에 어모장군은 모아진 천냥을 형에게 드렸다. 형 금헌공은 장정 10명에게 천냥을 짊어지고 남쪽 10여리가 넘은 거리에 있는 영계촌에 사는 사뭇 가난한 김가에게 그 것을 전한 뒤 수인(手印·수인)을 받아 돌아왔다. 김가의 소유로 된 명당을 구한 것이다. 그런 후 1년이 지나도록 이장을 하지 않았다. 아우가 하루는 형에게 정중히 물어봤다. “형님, 장택일은 언제인가요” 라고. 형 금헌공이 답하기를 “장택일은 어렵지 않으나 하관 3일만에 동생이 극락세계로 가는 혈이니 이 역시 어려운일 중의 어려운 일이 아닌가” 라고 대답했다.

그 때까지 어모장군은 슬하에 혈육이 없었다. 이 말은 들은 아우의 처 노씨 부인은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신 형님께서 동생을 살릴 묘수가 없겠습니까. 장군의 효성을 떠볼 양으로 하신 말씀으로 사료되니 다시 형님에게 이장을 서두르도록 간곡히 말씀드리시오”라고 말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전이 정해년 2월 을미일에 부친 산소의 면례를 마쳤다. 산소의 입향은 을좌신향으로 결정, 시행했다.

장례를 마친 형 금헌공은 동생 내외를 불러 “오늘부터 동생내외가 함께 아버님 산소에 시묘하라”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지만 흉화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동생 내외는 시묘에 나섰다. 그런데 시묘 첫날 잠 자정에 이르러 느닷없이 일진광풍과 함께 천군만마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모장군 내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장수인 듯한 자가 “우리는 천상조회에 갔다 온 틈에 동촌에 사는 이수찬이 김가의 자리에 자기 아버지를 이장했으니 파내자”는 등 야단법석이었다. 그러자 수장인 듯한 자가 “아니다 비록 대지명혈이 김가의 자리지만 돈 천냥을 받고 팔았으니 이 승지 자리가 됐다. 이후 행화가 있을 터인 즉 우리는 이 자리의 수호나 잘해주자” 라고 말했다.

이렇듯 믿기지 않는 상황이 지나고 잠잠해지자 두 내외는 시묘막에서 밖으로 나와보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온 누리는 적막에 싸이고 하늘에는 휘엉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후 안타깝게도 형의 예언대로 아우 어모장군은 운명하고 만다.

금헌공은 슬픔에 잠긴 제수에게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친 다음 “제수씨, 진정하오. 이미 제수씨는 홀몸이 아닙니다. 부디 자중자애 하시오. 그 유복자의 자손이 백자천손(百子千孫)으로 세를 누리고 부귀 겸전하게 될 것입니다. 동생의 자손이 먼저 발복하고, 그 후 양가의 자손이 똑같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과연 금헌공의 예언대로 였다. 현재 남원, 임실, 순창, 장수, 전주는 물론 전국 각처에 남자 손만 6천여명이 행세하고, 9대에 걸쳐 지사가 배출됐다고 한다. 부자로 산 후손도 부지기수다. 최근엔 전북지사도 배출되고 도의회 의장도 나왔다.

‘산이 또 산을 부른다’고 했듯이 아마 ‘오공비천형’의 명혈이 또 다른 명당대지를 쓰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번성했을 것으로 믿는다.

늦가을 간산길을 재촉하며 찾아간 ‘오공비천형’의 혈지는 그 옛날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했던 한 문벌의 구산과 위선사에 얽힌 사연을 간직한 채 명혈대지의 요건을 갖추고 그 곳에 의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우선룡의 이태교구의 명당이다. 용맥의 행도는 풍악산에서 진손맥으로 낙맥해 세 군데의 취기처를 응결하는 취기입수가 진괘맥으로 기복 위이한 뒤 뇌두 바로 뒷쪽에 속기처를 만들고는 비룡, 간괘맥으로 회두해 작혈했다. 그 곳에는 실전된 묘소가 진혈을 비껴 쌍금살을 받은 채 고총으로 써져 있었고, 그 계하에 승자공 이혼의 부부산소가 합장으로 자리잡은 채 당판에서 변국돼 좌선혈장을 짓고 승기처에 모셔져 있다. 한 영역의 혈장에 상하로 쓰여진 두 산소인데도 위쪽 묘의 후손은 무슨 사연으로 선대의 산소가 실전된 채 타문의 손에 관리되고 있으며 그 아래쪽 산소의 후손 번성은 그토록 크게 기약된 것인지….

여기서 필자는 위선사에서 털 끝만큼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선사의 가르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끝내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 사실은 뇌두 바로 뒷쪽의 속기처 때문에 작은아들이 먼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짐작이 가는데, 위쪽 실전된 산소는 왜 산제석 제단쪽의 진혈처에 소점 재혈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산길에 재실 왼편에 쓰여진 한양 조씨의 산소가 왠지 봉분에 비해 크게 보였다.

다음회 부터는 ‘인물 고장과 풍수’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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