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의 봉정리, 많은 인재 배출”
<60> 우리 고장의 인물과 풍수 (2) - 곡성 통명산 정기받은 음양택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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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지역은 인물고장의 대표성을 지닐 만큼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다.
왕조시대에도 인물의 맥이 줄 곧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풍수기행의 소재에서 이런 지역을 제외시킬 수는 없다.
이번에 소개하는 지역은 단위 마을이면서도 의외로 명당터의 요건을 잘 갖춘데다 인물 또한 많이 배출 돼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곡성군 죽곡면 봉정마을은 양택명당으로 소문은 나 있지만 정작 전문가의 관점에서 소개된 적은 없는 것 같다.
학술적으로는 이태교구 작혈의 대지에 속한다. 봉정은 한자로 ‘鳳停’이라 표기 되는데, ‘봉황새가 둥지를 틀어 안거하는 곳’이란 뜻으로 해석되고, 죽곡(竹谷)은 ‘대나무 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봉황새는 벽오동에 둥지를 틀지만 먹이는 대나무 열매로 알려진 상징적인 조류임을 암시해 준다.
봉황과 관련 깊은 마을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봉정마을의 양택길지의 명당 물형은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날던 봉황이 보금자리에 들어 알을 품는 형국)으로 전해지고 있다.
봉정마을로 들어가는 죽곡면 소재지부터 가까이 있는 마을이 하죽이고 더 깊숙히 봉정마을에 이르면 상죽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봉황과 관련 있는 명당터가 그 골짜기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음을 예고한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최근 봉정마을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이 마을 출신 조심(趙沁)씨를 만났다.
또 이에 앞서 통명산에도 올라갔다. 통명산에서 크게 낙맥해 결인목을 만든 진둔치부터 주부산을 거쳐 예로부터 전해오는 ‘장군대좌형’을 찾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다 했다. 그러니까 ‘비봉포란형’의 양택명당을 결혈하기 위해 내룡한 주룡을 타고 내려와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졌다.
점심도 간룡과정에서 때울 정도로 시간을 아꼈으나 워낙 변화무쌍의 행도를 거듭하며 장원하게 내룡한 용맥이라 하루해를 채울 만큼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필자가 이 용맥을 타고 내려온 경험은 이번이 네번째다.
저녁시간인데도 불쑥 찾아간 낯선 필자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준 조씨 내외의 정에 넘친 호의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질문과 그 밖에 참고 될 사항을 마치 미리 작성해 놓은 원고를 읽어 내려가 듯 막힘없이 설명까지 붙여가며 전해주는 조씨의 이야기에 감동하기도 했다.
첫 대면 이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은 물론 해박한 설명에서 느끼듯 조씨 역시 봉정마을이 배출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고 한사코 자기 노출을 꺼려하고 절제하는 겸손함에 그저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또 조씨의 설명 내용이 함안 조씨의 문벌에 치우쳐서 행여 문중 자랑에 빠질세라 여간 신중하지 않는 점도 필자와 일행을 놀라게 했다.
이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이야기를 많이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조씨가 들려준 봉정마을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봉정마을의 역사는 고려조에 현청이 죽곡의 본터 있었다. 당시 이름으로는 덕산촌, 덕양촌이라 불리는 마을이 이 지역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지만 정리된 사록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해 살았던 것은 옥천 조씨(일명 주암 조씨) 였으나 중간에 출향했다가 함안 조씨가 그 입향조인 조익화가 명당터를 찾아 약 300년 전 1717년(상속기록) 봉정마을에 그 뿌리를 내린 뒤에 또 다시 환고향해서 동향에 살게된 옥천 조씨가 소수 살고 있고, 그밖에 심씨와 권씨 그리고 이씨 등 극소수의 타성, 함안 조씨의 집성촌이 바로 봉정이라고 했다.
또 봉정마을이 깊은 산골에 위치하면서도 인물고장으로 알려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조씨는 강조했다.
“함안조씨의 선대중 추한 조원규가 이곳 태생인데 1911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올아와 신 학문을 후진들에게 교육시키는 ‘영류재’를 세우고 한편으로 남원 농업실습학교에 유학을 시켜 신 학문과 신 기술을 습득케 하는 헌신적 촉매 역할을 다한 것이 인물배출의 단초가 됐다”고 조씨는 설명했다.
조씨는 또 “이곳 마을이 양택의 명당길지라는 것과 그 음덕과 운기에 의해 머리와 지혜는 대도시의 고학력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텃기운을 내세우기도 했다.
선대의 예언대로 함안 조씨는 금환낙지의 명당터가 있고 오봉산이 보이는 구례군 토지면 구만리를 거쳐 이곳 봉황의 터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 지역 도처에 ‘비봉포란형’의 명터를 뒷받침해주는 지명과 지형이 조화를 이룬다고 덧붙였다.
옛날 ‘죽성리’라는 지명이 그렇고 ‘웃대실(上竹)과 하대실(下竹)’이 그러하며 ‘머바골(오동나무 상징)’이 또한 그러하다고 강조했다. 조씨의 설명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의 기억력과 체계적인 설명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젊은 시절 일제시기에는 중국으로 진출하기도 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농업기술 연수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탁월한 실력과 기능이 인정돼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에 크게 실린 그의 활약상이 눈에 선했다. 조씨 문중 선대들의 명터를 찾는 집념과 끈질긴 의지와 선대들의 미래 지향적인 안목에 힘입어서일까. 봉정출신과 그 후예들은 입신양명의 문을 열고 국가사회의 동량재로 부지기수 진출했다.
일제하의 대학교육의 어려운 시절에도 일본 와세다 대학교(조명표), 일본의 중앙대학교(조병제), 보성전문(조용우)등 3명이 일본 유학을 했으며 당시 곡성군 전체 5명의 대학생 중 3명이 봉정출신이었다.
1893년부터 1946년 사이에 죽곡면장 중 5명이 봉정출신이었고 1944~1975년 사이 행·사시 합격자 4명중 3명이 봉정마을 조씨였다고 한다. 1928~1979년 사이에 15명의 박사학위자가 배출되고 자유당 시절 이승만 정권하에서 원내총무와 정치 요직에서 명성을 떨친 조순씨는 50대 이후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조형래 곡성군수 등 고위 공직자의 배출과 조은정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 5명의 대학교수, 의학계의 인물도 10명이 나왔고 소설가 조봉래와 국전심사 위원장 조용민 등 예술가는 물론 조영재 서울예본교회 목사 등 3명의 목사가 활약 중이다.
심상철 한국과학기술원구원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수 많은 인물이 봉정마을에서 배출된 것은 마을에 터를 잡고 바깥 세상을 먼저 내다보면서 후손의 상향의지를 성취케 하는 선대의 땀과 부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을 출신의 선대와 자녀양육과 교육에 헌신하려는 의지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를 일러 ‘인결은 지령’ 이라는 풍수지리적 논리에서 해답을 제시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편견일까.
명당터의 서기를 타고난 사람은 그렇지 않는 경우보다 불가사의에 가깝게 성공하는 후손과 인물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을 더 깊히 생각해 보고 이왕이면 길지에서 삶을 누리는 지혜를 배워햐 할 것으로 믿는다. 봉정마을의 생기있는 텃기운이 어디서 부터 전해져오는 가는 제시된 산도로써 대신한다. 다음은 산도에 표기된 봉전마을 근원이 된 통명산하의 음택명당을 탐방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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