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장군이 출정 앞두거나 승전후 당당히 앉아있는 形”

화이트보스 2009. 1. 21. 16:47

[풍수기행]“장군이 출정 앞두거나 승전후 당당히 앉아있는 形”

<62> 우리고장의 인물과 풍수 (4) - 곡성 통명산 정기 머문 음택명당(장군대좌형)


 


곡성 옥과의 설산을 거쳐 무등산으로 나아가는 대 지룡의 한 지점에서 분지돼 따로 떨어져 발달한 용맥이 일으켜 세운 준봉이 곧 765m의 수봉 통명산이다. 그래서 일까. 통명산에서 발달해 뻗어나간 용맥은 거의 모두가 강세룡인데다 그 행룡의 변화 또한 다양하다. 그런 탓에 통명산하의 수 많은 산봉에서 내룡한 용맥에는 크고 작은 명혈대지가 숱하게 많다. 거기다 보성강과 섬진강이 싸고 돌면서 흘러가니 산수의 조화가 잘 돼 명혈을 짓게된 것이라는 믿음도 간다. 그 중 양택(집터)명당으로 죽곡면 소재의 봉정마을을 소개했고, 음택의 대지 중에서는 ‘약마부적형’을 필자가 간산한 체험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제 통명산하의 제일승지로 손꼽히는 그 유명한 ‘장군대좌형(장군이 출정을 앞두거나, 승전한 뒤에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의 답산기를 쓸 차례다.

우리 고장 전남·광주의 모든 지역을 두루 답산하고 기행문을 쓰려고 하는 제한성에 밀려서 호남 56대 대지의 4품 1순위에 드는 곡성군 오산면 검장산하의 ‘갈룡음수형’과 석곡의 보성강 건너 아미산하에 숨어있다는 국중 대지 ‘매화낙지형’을 쓰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필자는 통명산하의 대지명혈로 알려진 죽곡 봉정마을 뒷산 어딘가에 그 몸을 감추고 있다는 장군대좌형을 찾아서 그 주변이라도 밟아 보기 위해 수년전 부터 성주봉에서 봉정마을 뒷산까지 답산해 보고, 통명산 정상에서 12절의 낙맥을 타고 내려와 ‘진둔치’를 거쳐 43절이 넘는 용맥을 샅샅이 실측하며 오르내리기를 수차례 체험했다.

그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의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정작 천장지비(하늘이 비밀스럽고 땅을 깊이 감춰둔)의 ‘장군대좌형’의 명혈을 찾는데 헛 걸음을 많이 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야 겠다.

그 중 한가지는 장군대좌형의 천하대지가 그 명성만큼이나 수혈 중의 수혈이지만 그 자리를 잡아 쓴 후손은, 죽곡을 흘러내려간 골육수의 직거수가 2㎞에 달해 150년 내지는 200여년간 걸식자(거지)가 나온 이후 그 큰 음덕이 발음해 국중인물이 연이어 나오는 천년향화지지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군대좌형’의 물형을 띤 대명당은 이른바 ‘장군봉’과 관련을 두고 그 혈처를 맺는 것이 물형론에서 제시하는 보편적인 사례인데, 이 경우 장군봉이 솟아있는 곳으로 크게 보아서 진혈이 있는 주룡의 백호맥에 해당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또 국내 유수한 풍수지리 연구가가 펴낸 유산록에 기록돼 있기를, 진혈은 산봉의 상상정에 자리잡고, 그 국세의 모든 물이 합수되어 백호와 청룡이 만나는 곳으로 뼈져 흐르는 곳이 동남방에 해당되며 역시 골육수가 직거 하니 200년 걸식자손이 연출하다가 발복하는 대지인데, 김 아무개의 선산이 점혈돼 있다고 기술해 놓은 것을 읽은 점도 필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호남지역에서 그 이름만 들먹여도 풍수가에 널리 알려질 만큼 인지도가 있는 명 지사가 그 친산을 이미 ‘장군대좌형’의 진혈에 이장했다는 말도 들렸고 필자도 언젠가 그 장본인으로 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그렇다면 2명의 명풍이 지정하는 곳의 산소만 찾게 되면 ‘장군대좌형’의 진혈처는 보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글을 쓰기 위해 필자와 몇몇 동호인들은 2회에 걸쳐 그 길고 긴 용맥을 타고 내리며 우선 기설묘 부터 살피고 다음으로 용진혈적의 대 원칙에 입각해서 나름대로의 진기의 응결처를 찾아 보았다. 그 결과 김모의 친산은 아무데도 찾아볼 수 없었고, 산도의 <가>지점과 <나>지점에 안장된 산소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다>지역은 오래전에 이장해간 흔적이 있었다. 또 산 줄기의 취기처라 여길만한 곳에 묵은 묘가 있거나 파묘해간 흔적으로 주룡의 산맥은 온통 묘 자리와 관련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거의 모든 기설묘(현존묘와 파묘된 산소를 합쳐)자리에서 보면 죽곡의 길고 긴 직거수가 보였고 좋다는 주변의 아름다운 산봉들이 나열해 가히 장관이었다.

필자의 회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50년 내지 200년의 걸식이면 적어도 5대나 6대에 걸친 긴긴 세월인데 그런 후손이 그 혈손의 맥을 이어 존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토록 명혈대지가 그 강세에 의해 몇번의 소흉을 거친 후 발음이 돼야 한다는 것이 건전한 상식이고 풍수지리의 합리적 이치인데, 그것을 뛰어넘어 과장된 예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풍수지리의 기본이자 핵심원리를 좇아 용진혈적의 준거를 대입해 가면서 진둔치에서 분지점(산도 <라>지점 산봉)까지 32절의 용맥을 따라 실측한 다음, 분지점에서 낙남하는 주룡맥을 면밀하게 검토하며 실측해 나가면서 어디에서 그 길고 긴 주룡맥이 기지맥지를 하며 매조지를 했고, 그 인근에서 혈을 맺기 위한 용맥의 교도가 교구통맥법(양용맥과 음용맥이 법도에 따라 배합하되 그 중간의 선매룡이 참되게 중매역할을 했는지)에 맞는가를 따지고 또 따져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느 권위있는 예언성 결록에서 이곳의 진혈은 병좌(남남동쪽에 머리를 두고 북북서쪽을 향해 쓰는 입향)로 돼 있다는 구절을 읽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룡의 용맥이 틀림없는데 그게 가능한 결작일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의심하면서 긴가민가 했는데 ‘주부산(산 아래 동네의 노인들은 이 봉우리를 일러 장군봉이라 일러줌)’에서 낙맥, 비룡한 용맥이 주필봉을 세운 뒤에 거의 90도 가까이 머리를 틀어 그 방향을 바꾼 이후 그 곳 어딘가에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혈을 지어 놓고는 그 회룡맥의 옆구리에서 다시 출맥한 용맥이 낙맥, 비룡하여 천마사를 세워, 대 단원의 행도를 마무리 지었다. 또 다시 발진해 ‘성주봉’을 치솟게 하곤 이내 봉정마을을 향해 40~50절의 행도를 하며 위이, 기복, 낙맥, 비룡의 변전을 거듭하다가 그 유명한 ‘비봉포란형’을 형성하며 봉정마을로 살짝 내려 앉았다. 필자가 진혈처라고 소점한 곳이 과연 ‘장군대좌형’의 명혈일까. 그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선 600고지가 넘는 고산지역에 ‘주룡의 강령’에 나온 동·정의 정(고요함)을 기약하는 드넓은 내명당이 편사되지 않고 혈처를 안정되게 받쳐주고 회룡의 용맥이 서로 교쇄해, 내파를 계축(동북북방) 아니면 간인(동북방)파로 만들었으니 결록대로 병좌나 미좌로 입향토록 천작으로 작성되고, 백호맥의 장군봉은 혈뒤를 옹위하는 낙산이 되었다.

그리고 남쪽에 세워진 천마사로 인해 200년 걸식이 난다는 죽곡천은 그 언저리도 보이지 않게 막아주고 동쪽에서 동남방에 걸쳐 나열한 어 병사는 장군의 옹위사가 분명하다. 그리고 전면의 둥그런 산봉이 중중첩첩 적군의 군막이 확실하니, 여기가 예사 지점이 아님을 헤아릴 수 있었다.

여기 또한 필자의 자기모순에 따른 ‘자기예언적 충족감’에서 비롯된 과장이거나 허화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명사들이 소점한 곳이 ‘장군대좌형’의 대지라면 이곳은 그 보좌관쯤되는 차석이라도 좋다. 용틀임치며 내룡한 기세등등한 내룡맥이 빙글 돌아 앉아 보일 듯 말듯 결혈해 놓은 곳, 그 우선룡 교구통맥의 결작 역시 용장혈졸의 상징이기도 했다. 용장혈졸, 즉 ‘용맥이 길게 오면 혈은 작게 자리잡는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필자의 더딘 인식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진혈은 혈수가 아닌 혈졸이어서 찾기도 어렵고 모습도 하잘 것 없이 보인다는 참뜻을 뒤늦게 알고는 늘 겸허한 자세로 심룡 심혈에 임하는데도 필자의 미치지 못한 안목이 부끄럽다는 얘기다.

다음회 부터 본 주제를 잠깐 멈추고 차기 대권주자로 떠오르는 ‘빅3’의 생가와 선영의 답산기를 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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