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죽음 무릅쓰고 명혈에 선친모신 희생 돋보여”

화이트보스 2009. 1. 21. 15:55

[풍수기행] “죽음 무릅쓰고 명혈에 선친모신 희생 돋보여”

<57> 후손위한 살신성인의 위선사 (2) 장사후 호상 기꺼이 감수


 




풍수지리학에서 전해지는 내용 중 학리적인 것과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를 가끔 접한다.

그 중에서도 남의 집안 용사(用事)를 실천하고 있는 지사(地師)들에게 경종을 주는 말은, “풍수사는 손자 똥이 귀하다” 는 것과 “대지명혈일 수록 소흉(小凶)이 따른다”라는 것이다.

이번 소재는 두번째 것에 해당된다.

그런데 소흉이라는 것의 범주와 대소경중은 어디에 준거를 둬야 할 것인가. 이게 늘 궁금하던 터였다.

그러던 중 지난번 ‘대통령의 생가와 선영’ 편을 쓰고 나서 소흉은 마냥 작은 놀람이나 소소한 사고 따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너무 큰 대혈은 그 만큼 더 무겁고 큰 흉화를 동반하게 되고, 소지나 중지는 그 규모에 걸맞는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우치게 되었다.

필자가 간접체험을 통해, 강세룡의 대지에는 흉사가 따르다가 후일 그 강세룡의 살기가 부드러워지는 시기에 이르러 크게 발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년 전 어느날 한 제자로 부터서 흥미로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여기는 지리산 자락의 한 준봉으로 840m의 고혈인데 경주 김씨와 인연이 닿아 조상의 묘소에 상석 놓는 일을 돕기 위해 현장에 와 보니 혈장(穴場·묘소를 쓸 수 있는 혈의 영역)에 이어지는 마무리의 입수맥에 하얀 차돌의 암석이 반석을 이루며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필자는 대뜸 “모르긴 해도 그 산소를 쓰고 그 후손중에 곱사등이가 두 세명 나왔을 것이고, 아마 요절한 사람이 몇 명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필자는 “그러나 그 산소가 용진혈적에 맞는 진혈이라면 발복의 시기를 맞아 권세가 등 무관과 부자가 숱하게 배출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필자의 답변은 필자가 해득한 것이 아니라 옛 선사들의 예언록에서 얻은 하나의 정보였을 뿐이었다.

뒤에 확인한 일이지만 예의 그 금문의 산소터를 소점해 주려던 당시의 명지사가 “이 곳은 매우 큰 명혈에 속하나 초패(初敗·묘를 쓰고 곧장 나타나는 흉화)를 먼저 겪고 나서야 크게 발복 될 수 있는 강세의 혈인바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으면 소점해 재혈 하겠다”는 조건부 점혈이었는데 당시 그 집안의 종가댁 어른이 종친들에게 어렵게 동의를 받아내 선영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명지사의 예언대로 흉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희생마저 각오하고 명혈에 조상을 모셨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기라성 같은 인재가 그 문중에서 배출돼 고급공무원에서부터 개인사업가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후손이 번성하기를 비원하면서 스스로 살기혈의 흉화를 받아 비명에 간 그 선조의 뜻을 기리기 위해 800고지가 넘는 고지의 산소지만 성묘에 성심을 다하고 묘역 관리에도 힘쓰고 있다.

이번 회는 ‘산소 이장을 마치고 난 당일 밤중에 장자가 호상(虎傷)을 당한다’는 지관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명혈대지인 오공비천형(蜈蚣飛天形·지네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모습)에 선대를 안장하고 끝내 주상인 장자가 비명해 간 실화를 소개한다.

앞서 제시한 실화는 다만 본론을 도출키 위한 예화에 불과하다.

전의 이씨(全義 李氏) 장손 집안인 문의공파의 정랑 창수(昌壽)의 유택에 관한 이야기다. 이창수는 조선 연산군 때 문관에 급재해 예조정관과 승문원 판교란 벼슬을 지내다 그의 후손들이 전주인이 되도록 계리를 만들기나 하듯 전주에 내려와 노후를 보내다 이른 바 지네혈에 묻혔다.

이 산소가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조장 이후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으로 삼도초모사를 역임한 이정란과, 역시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과 함께 왜적을 물리친 이영남을 배출했다. 두 장군 모두 창수의 증손이다. 그러나 세인들의 관심과는 달리 필자는 이 묘소가 쓰여지게 된 연유에 초첨을 맞춘다.

내용의 단초는 속칭 하성부지(何姓不知·성도 이름도 몰라 부르게 되었다는 별칭)에서 비롯된다.

하성부지는 전설과도 같이 전해지는 실제 인물로, 어느 정문(鄭門)의 집(集)이라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하성부지의 출생에 얽힌 사연이 흥미롭고 특이하다.

정집의 부인이 혼전 ‘지렁이’ 혼신과 꿈에 잠자리를 한후 배가 불러 결혼 3일만에 태어났으니 그럴만도 하다. 정집의 특별한 호의로 감쪽같이 자라 온 그가 10세 되던 해에 출가했다.

워낙 신동의 잠재력을 가진 그 인지라 젊었을 때 풍수지리에 통달했다. 그러던 중 의부인 집이 죽자 나타나 화심리에 작약반개형 (芍藥半開刑·작약꽃이 반쯤 피어나는 모양)을 점혈해 안장한 연후에 그 후손의 일문이 오늘날 번성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성부지는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는 하성부지라는 사람이요”라고 소개해 세칭 하성부지로 통했다.

그가 어떤 인연에 끌려 전의 이씨 장자 후손인 이창수의 유택을 그 유명한 ‘오공비천형’에 소점하게 된다.

노후에 전주로 낙향한 이창수의 슬하에는 형제가 있었는데 소문난 효자였다.

그 형제 중 장자가 길손처럼 지나다가 들린 ‘하성부지’를 알아보고 수년간 극진하게 대접했다. 후덕한 인품과 위선사에 쏟는 정성에 감탄해 점혈해 준 곳이 바로 지금의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뒷산의 이른바 ‘지네산’의 전의 이씨 족장지 중 최상단에 자리잡은 지네혈이다.

이 혈에 장사하기 전 하성부지가 이창수의 장자를 불러놓고, “묘역에 한 묘만 단장으로 쓰면 정승이 3명 배출되고 계장하면 명상이 1명 나온다. 그러나 석중혈이라 장사후 한밤중에 장자가 호상을 당할 것이다”고 일러줬다.

그런데도 장자는 “감사합니다. 사람은 한번 죽는 법인데 선친을 좋은 곳에 모시고 자손대대로 번창한다면 먼저 가는 것 쯤은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장자는 당일에 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성부지는 초상마당에서 “망인은 하늘이 낸 효자다. 내 어찌 가만히 있을 손가. 오공혈은 원진수가 직거수로 빠져나가니, 비록 귀인이 연이어 배출될 대지이나 빈국이다. 망인을 ‘좁은 목’에 있는 갈록음수형(목마른 사슴이 물을 만나 갈증을 해소하는 형국)의 자리에 안장해야 겠다”고 말했다. 그 자리는 부국이다.

이 후 전주 전의 이씨는 향반으로 부귀를 누리면서 지역주민들의 칭송을 받는 문벌로 번창했다.

다른 시각에서 편견을 두고 보면 황당하고도 믿기지 않는 전설같이 들릴 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자 그 장자의 살신성인의 정신이 헛되지 않았다.

큰 명당을 쓰면 호상이 따른다고 하는데 이는 소흉을 대변한 듯 하다. 사실은 다른 변고나 흉액도 호상으로 전해오는 것은 그 희생을 신성시하려는 듯이 보여진다.

요즘 들어 이를 교통사고 등으로 단정지우기도 한다.

필자는 오공혈에 묻힌 이창수의 묘소를 찾아 묵념하면서 갈독음수형에 고이 잠든 그 장자의 산소도 꼭 찾아가 참배하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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