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4)=광산 호가정

화이트보스 2009. 1. 22. 15:25

정자기행(94)=광산 호가정


 


▲ =기묘사화 간신배 횡포 환멸느껴 낙향

▲ =雪江 선생‘절의’극락강과 430여년 도도히 흘러

▲ =환벽당 김성원의 장인…당대 명유들과 교유 활발



조선 중·명종대‘절의 선비’설강 유사(雪江 柳泗·1502~1571)선생이 만년에 묵었던 ‘호가정(浩歌亭)’을 찾았다.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노평산 기슭에 자리한 이 정자는, 중국 송나라 소강절(邵康節)이 말한 호가지의(浩歌之意)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설강 선생의 정신은 극락강과 함께 430여년을 도도히 흐르고 있다.

송강 정철을 제자로 삼았던 담양 환벽당의 주인 김성원의 장인이기도한 설강 선생은 1502년(연산군 9) 5월 14일 광산구 본덕리에서 봉훈랑(문관 또는 종친에게 준 종 5품벼슬) 경흥교수(유생을 가르치는 선생) 류희송(柳希松)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일찌기 학문이 깊어 27세에 문과에 급재하여 삼사(사헌부·사간원· 홍문관)를 비롯 여러 벼슬을 거쳐 무장현감(茂長縣監) 전라도사(全羅道事) 삭주부사(朔州府使) 종성부사(鍾城府使)등을 역임 했다.

이량(李樑) 일파가 국정을 맡으면서 선생의 명성을 듣고 몇 차례 만나기를 원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 이후 선생은 간신배들의 횡포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광산 본덕(本德)으로 내려와 남쪽 구강 언덕에 호가정(浩歌亭)을 짖고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설강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온 소회는 그의 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있다.

-시원한 돌베개에 솔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이 뚜렸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히 돌아 온다.//

아래는 구강(九江)이은 위에는 하늘인데/ 늙은이 할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일을 뭣하러 생각할꼬/ 늦사귄 물새가 한가로히 졸고있네.



곧고 순직했던 설강 선생. 당시의 시대 상황은 당파 싸움(기묘사화)으로 홍경주, 남 곤 등 낡은 중신들이 이상정치를 주장하는 조광조, 김 정, 이 고장 출신 눌재 박상과 같은 어진 인물들이 내쳐지고 혹은 죽임을 당하는 등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설강 선생은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내던지고 정든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살 수 밖에 없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설강 선생에게는 또 한가지 시련이 있었다. 을사사화(조선조 명종 1년 명종의 외숙 尹元衡이 仁宗의 외숙인 尹任과 그 일파를 몰아낸 사건)라는 모진 소용돌이 속에 선생과 같은 동족인 유 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 중신들이 표독한 간신들의 올가미에 걸려 희생되기도 했다.

그 중에도 좌의정을 지낸 유관(柳灌)은 지덕(知德)을 고루갖춘 당대의 명현(名賢)으로 설강 선생이 그지없이 존경하는 터라, 그 분이 아무런 허물도 없이 사약을 받고 비명(非命)에 갔으니…, 그 통분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었겠는가.

나중에 이량(李樑)일파가 쫓겨나고 조정에서 다시 중용할 뜻이 있어 선생을 도승지(승정원의 여섯 승지 가운데 으뜸인 정 3품 벼슬)와 영해도호부사(종 3품 지방관)를 주어 불렀으나 병을 핑계하여 나아가지 않았고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1571년(선조 4) 향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때 도내 유림들이 그 학덕과 높은 기절(氣節)을 기려 경렬사(景烈祠)를 지어 현재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저서‘설강유고집’과 ‘위친필봉제축유서’가 현전한다.

이 정자는 1558년(명종 13)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불타 없어져, 1871년(고종 8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1932년과 1956년 중수하였다. 여기에는 호가정 현판을 비롯하여 설강의 호가정기와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후손 유보한의 호가정 중수기, 호가정원운, 근차설강정운, 근차판상운등과 오 겸, 이안눌, 김성원 등이 누정제영을 새긴 편액이 걸려있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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