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6)=광산 칠송정

화이트보스 2009. 1. 22. 15:43

정자기행(96)=광산 칠송정


 


▲광산 칠송정

▲ =푸른 솔처럼 청청했던 조선 선비 기효회

▲ =대학자 기대승의 장남…임란 때 의병활동 두각

▲ =선조 벼슬 내렸으나 거절, 초야 묻혀 도학 전념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일명 너부실) 백우산 자락을 파고들면 임진왜란 때 의창(義倡)인 함제(涵齋 기효회(奇孝會) 선생의 정신을 묻고 있는 정자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성리학자 고봉 기대승 선생의 도학사상을 잇기 위해 건립된 고봉학술원 옆에 자리한 칠송정(七松亭)은, 정자의 이름에서 풍겨지듯 사시사철 푸르른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오롯히 담고 있다.

특히 정자의 주인인 함재는 고봉 기대승 선생의 장남으로서, 부친의 뜻을 좇아 벼슬길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며 평생을 지낸 조선의 큰 선비다.

함재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대적하였고 의곡(義穀) 3천석을 수집하여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수송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를 지켜 본 선조 임금은 군기사검정(軍器寺劍正)을 제수했으나, 그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이 곳으로 내려와 초막을 지어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이 정자의 건립 시기는 문헌상 정확한 기록은 없어서 확실한 연대는 추정할 수 없지만 초건(初建)은 임진왜란 이후인 1650년대로 짐작된다. 그동안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칠송정(七松亭)’이란 정자 명은 의병으로 참여했던 함재 선생의 활동에 감탄한 선조 임금이 ‘천리길을 멀다 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의(忠義)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는 말을 듣고, 함재 선생이 이 곳에 일곱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청고한 절개를 본받았다.

특히 그의 호(號)를 함재(涵齋)라고 한 것도, ‘넣고 들이며 가라 앉히고 쌓아두어라’라는 아버지 기대승의 훈계를 따르기 위해 지은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칠송정의 건축적 특징은 외벌대 기단 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건물 4면에 머름을 설치하고 마루는 귀틀에 의한 우물마루로 되어있다. 또 주두 위에는 창방소로 장혀를 가구 굴도리를 올린 5량집으로 꾸몄다.

정내(亭內)에는 한말의 거유(巨儒) 윤용구 선생이 쓴 현판을 비롯 광무 9년(1905년)에 10대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 중건기(七松亭 重建記)’, ‘호산승처필명정(湖山勝處必名亭)’, 8세손 기봉국이 쓴 ‘칠송정운’이 걸려 길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산 경치 좋은 곳에 좋은 정자 세우니/ 아득한 넓은 산과 물이 푸른 병풍 둘렀도다./ 땅이 열려 동산의 숲이 맑고 아름다워서/ 자연이 생긴 산수의 경치 신선의 영기 지켰도다/ 뛰어난 경관 즐길만 하고 인지의 덕을 겸하였고/ 깊어지는 흥취로 취하고 깨기를 마음대로 하네/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사람이 유독 사랑하니/ 예전에 닦은 유적이 아직도 씩씩하네. <기봉국의 ‘칠송정운’전문>

함재 선생이 심었다는 일곱그루 소나무(七松)는 찾을 길이 없고, 지금은 괴목 만이 남아 후손들이 가꾸어 놓은 배롱나무와 어우러져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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