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기행(97)=광산 만취정
▲정자기행(97)=광산 만취정
▲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리는 민족 ‘방패’
▲ =만취 심원표, 벼슬길 마다하고 초야 묻혀 강학
▲ =한말 대학자들 선생의 덕행 찬미 시문 ‘눈길’
|
▲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리는 민족 ‘방패’
▲ =만취 심원표, 벼슬길 마다하고 초야 묻혀 강학
▲ =한말 대학자들 선생의 덕행 찬미 시문 ‘눈길’
-금성산 북쪽에 숨어살면서 한 정자를 새로 짓고/ 푸른솔의 높은 절개 그 빛이 남아있네/ 구름 낀 숲 속에 살면서 나의 뜻 이루었고/ 산 집에서 빚은 술로 손님 술상 차렸도다./ 땅을 덮은 맑은 그늘이 선비집 마당 깊숙하고/ 하늘높이 솟은 기상 사시장철 푸르다네/ 만취라는 두 글자 이 정자를 이름하니/ 무엇하러 많은 꽃들과 이른 봄 볕 즐긴손가. <청송인 만취 심원표 詩>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남동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만취정(晩翠亭)을 만날 수 있다. 만취정은 이 마을 출신으로 한말의 대학자이며 절사(節士)인 만취(晩翠) 심원표(沈遠杓·1853~1939)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만취정 주변으로 정자의 건립 연대를 가늠케하는 100여년을 족히 넘겼을 고목들이 빽빽히 들어서 간간히 찾는 후학들을 맞고있다.
기묘 명현(己卯名賢) 묵헌(默軒) 심풍(沈豊)의 13대손이기도 한 만취 선생은 나이 이십 이전에 문간공 노사기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위인의 도(道)를 배웠고, 신축년에는 문충공 송병선으로부터 존양의 의리(義理)를 배웠다. 이로인해 조정에서 성공감역의 벼슬이 재수 되었음에도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초야에 묻혀 자연을 벗삼아 학처럼 깨끗한 삶을 살았다.
만취 선생의 올곧았던 선비사상은 나라가 기울어 일제 침략이 감행되자 더욱 사철나무처럼 두드러졌다. 당시 선생은 의병장 김 준, 전수용, 심수택을 적극 도와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는 민족 수호를 위해 팔을 걷었다.
그가 걸었던 역사적인 행적들은 각종 문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의병활동 중에 왜적들에게 붙잡혀 장성과 광주 등지의 헌병소에 구인돼 심한 고초를 겪었고, 총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며 조선 선비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의 이러한 선비 사상은 ‘만취(晩翠)’라는 호(號)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정내(亭內)에 걸려있는 ‘만취정 소서(晩翠亭 小序)’를 찬찬히 살펴보면 ‘나의 씨족인 심씨의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되어있고 또 솔(松)이라는 나무가 언제나 울창하여 겨울 추위에도 그의 푸름을 잃지 않은 높은 절개를 갖고 있다. 이 정자를 남쪽에 지어 ‘만취(晩翠)’라 한 것은 소나무의 이러한 절개를 본받아 나의 만년을 보내는 서식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함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정자의 처마 끝에는 ‘만취정(晩翠亭)’이란 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하나는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글이고, 다른 하나는 석촌 윤용구가 썼다. 이와함께 한말의 학자인 송사 기우만,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등이 선생의 덕행을 찬미한 시문과 주인 심원표 선생의 ‘원운 원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말 감역(監役)을 지내기도 했던 만취 선생, 그는 한일합방 이후 일체의 사사금(思賜金)을 거절한 채 고향에 은둔해 강학과 효도로써 한평생을 마쳤다.
만취정은 다른 정자에 비해 대체적으로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정자 옆으로는 남동사와 동호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현재 남동사에는 만취 선생을 비롯 남석(南石) 심종대(沈鐘大), 주봉(柱峰) 심한구(沈翰求) 선생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풍수기행 > 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9)=광산 학림정사 (0) | 2009.01.24 |
---|---|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7)=광산 불환정 (0) | 2009.01.22 |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6)=광산 칠송정 (0) | 2009.01.22 |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4)=광산 호가정 (0) | 2009.01.22 |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94)=광산 호가정 (0) | 2009.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