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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한말 때의 유학자 금우 임상희 선생이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자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광산구 등임동 외등마을로 들어와 ‘학림정사(鶴林精舍)’짓고 지역 인재를 모아 민족혼을 일깨웠다.
▲사진(2)=매년 봄이면 지역 유림들이 학림정사(鶴林精舍)에 모여 금우 선생의 학통과 민족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정사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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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어지러운데 선비의 갈 길 어딘가”
▲ =한말 선비 임상희, 망국의 한 달래며 인재 講學
▲ =‘금우유고집’현존, 선생의 품성 오롯히 느껴져
듬성 듬성 추수한 논둑길을 지나 얼마나 달렸을까. 어등산 자락 끝에 외롭게 자리잡은 학림정사(鶴林精舍)를 찾는 수요일 오후의 하늘은 마냥 푸르고 높기만 했다.
이 정사(精舍)는 국가의 장래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깜빡거리던 1902년 광산 출신 유학자 금우 임상희(錦愚 林相熙·1858~1931) 선생이 건립, 지역 인재들을 모아 강학하며 민족혼을 불살랐던 곳이다.
정사(精舍)를 찾아가는 길목엔 만추의 계절을 소리없이 말해주듯 샛빨갛게 익어가는 감과 누렇게 익어 고개숙인 곡식, 여린 바람에도 한들거려 은빛을 머금은 갈대꽃이 어우러져 가을의 정취를 자아냈다.
정사(精舍)의 주인 금우 임상희 선생은 1858년 3월 15일 임곡동 등림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평택(平澤)이요, 호(號)는 금우(錦愚)로 한말 유학자로 명성을 날린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이란 비극을 당하게 되자 세상을 등지고 이 곳에 은둔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의 젊은 날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고종 갑오년에 왜구의 침략이 있었고, 선생의 나이 41세에 이르자 궁중시혜가, 그 이듬해엔 삭발조치 등 역사적인 격랑을 거쳐 경술합방의 비운을 맞게되었다.
나라의 꼴이 흡사 옛날 중화의 은나라와 계나라를 연상케하는 현실이었다. 정신이 올곧았던 선생으로서 이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었겠는가. 이때 선생은 ‘의관을 갖춘 선비들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금우 선생이 이 곳 어등산 자락 초야에 묻혀버린 것도 나라잃은 선비로서, 그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으리라.
특히 선생은 고종인산(高宗因山)에 참례(參禮)하고 돌아온 후 부터는 애국정심(愛國精心)을 참다못해 사문자정(私門自靖)하면서 오직 사문정수(斯文精修)에 일생을 바쳤다.
생전에 민족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금우유고집(錦愚遺稿集)’ 상·하권을 남기고 1931년 73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현재 ‘금우유고집’은 선생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 유고집에 수록된 ‘학림정사(鶴林精舍)’란 시 한구절을 음미하며 선생의 행적을 되새겨 본다.
-우뚝 높이 솟은 정자 산그늘에 세워지니/ 시냇물 산골짜기 예전보다 그윽하네/ 하늘의 맑은 풍월 내가 모두 차지하고/ 세상의 티끌 연기 모두가 침노하지 못하네/ 온 종일 책을 보며 두 눈을 부쳤고/ 때에 따라 구경하며 이 마음 달랬도다/ 깨끗한 수풀 속에 짐승 발자국 멀어지고/ 띠 같은 좁은 길에 옛사람들 찾아오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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