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신도비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조선의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을미사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한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가 작성한 일명 웨베르 보고서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부 문서관리소에서 발견되었다. 2000년 10월의 일이었다. 우리는 명성황후가 궁궐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의 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것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다.
도대체 범행은 어떻게 모의되었으며 살해범들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웨베르 보고서에는 일본의 비상식적인 만행을 폭로하고 있다. 그 분량만도 3백여 페이지에 이른다. 보고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자세하게 검토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비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쓰러뜨리고 가슴을 짓밟고 칼로 베었다.'
웨베르 공사는 당시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자국 공사관에 알리고 다른 외교사절들과 더불어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고종임금과 명성황후는 궁궐에 서양관을 짓고 미국인과 러시아 및 영국, 프랑스인들을 머물게 했다. 그 이유는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본인들이 함부로 궁궐에 난입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그날 숙직이었던 러시아인 사바틴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없었다면 감쪽같이 숨겨졌을 것이다.
웨베르 보고서는 그 증거가 담겨 있다. 각국 공사관들은 일본 공사관에 가서 사건의 진위를 캐묻지만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 만하다." 미우라의 말에 웨베르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 미우라는 이 말에 당황하며 다시 알아봐야 한다면서 외국 공사들과의 회담을 서둘러 끝낸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 공사관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것이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생생히 담은 웨베르 보고서를 통해 명성황후 최후의 날을 되짚어보자.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총성이 울리고 이것이 명성황후 살해음모의 신호탄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제10연대는 궁궐의 북서쪽인 추서문과 북동쪽인 추동문으로 공격해온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공격에 시위대는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퇴각한다.
광화문에서 시위대와 일본군 간의 교전이 벌어지고 홍계훈을 비롯한 시위대 전원이 전사함으로써 광화문은 일본군이 접수하게 된다.
일을 저지르고 사태를 마무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45분 정도.
일본의 살해위협을 느낀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건청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옥호루로 통하는 두 개의 문들은 모두 일본 사무라이들이 봉쇄했다. 여기서 러시아인 사바틴은 명성황후 살해 행동대와 마주치게 된다. 제복 차림의 일본군 장교들이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뜰에는 40명의 조선군사가 늘어서 있었다. 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살해되어 시체로 옮겨진다. 살해범들은 여기서 증거인멸을 위해 황후의 시신을 불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 버린다. 웨베르 공사는 이 보고서의 마지막에 이런 글을 쓴다.
'전쟁도 아닌 평상시에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추악한 만행이다.'
옥호루 안팎은 명성황후를 찾아다니는 일본인들로 가득했고 명성황후는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군사 40명이 시해현장에 있었다는 점이 좀 이상하다. 그들은 왜 시해현장에 있었던 것일까?
웨베르보고서는 그 조선군사 40명의 정체를 밝혀놓았다. 조선군사들은 훈련대 소속이었다. 훈련대는 일본의 강압으로 만들어진 조선인 군대다. 조선군을 친일화 시키는 작업으로 훈련대에 일본군 교관들을 집어넣은 것이다. 훈련대는 일본군에 의해 조종되는 조선인 부대.조선 강탈을 목적으로 삼았던 일본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확보가 필요했고 훈련대를 통해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조선의 군대를 일본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군사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들의 목적을 간파하고 훈련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시해사건 하루 전 고종의 훈련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시해현장에 갔던 훈련대 병사들은 해산령에 불만이 있어서 옥호루로 간 것일까? 보고서는 그들(조선인 군대 : 훈련대)이 전투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훈련대에게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려고 훈련대를 시해현장에 동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흥선대원군이 강녕전으로 납치되어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제거작업이 끝날 때까지 감금당하기도 한다. 대원군에게 명성황후 살해누명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일본의 술책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당일에는 고종임금도 왕세자와 함께 일본인들에게 포위되어 발길질을 당하고 칼자루로 얻어맞는 등의 폭행을 당한다.
웨베르보고서에는 고종의 증언도 담겨 있다.
"과인의 눈앞에 일본인들, 와타나베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키, 오카모토가 칼을 빼어들고 쳐들어왔고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비를 붙잡았다."
현장 목격자들 중에서 고종은 유일하게 살해범들의 이름을 거명한다.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황후를 살해한 자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명성황후 제거작업에 가담한 행동대는 이십여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민간인들이었다.
양복과 기모노를 입고 칼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었다.
과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구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세운 언론기관이 있었으니 한성신보사가 그것이다.
한성신보사는 창립부터 공사관에서 모든 운영비를 지급하고 한국에 기자를 가장한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정보수집을 하던 기관이다. 이 중 한성신보 사장인 이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한다. 행동대 지휘의 총책임자인 시바 시로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 유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이들 외에도 시해사건의 행동대원들은 당시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로 뭉친 극우분자들이었다.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의 보도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일본을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들끓자 일본 정부는 살해범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도쿄로 소환한다.
사건을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기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뒤 범죄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석방한다.
범죄자들은 석방된 뒤 구국의 영웅으로 일본 전 국민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일본 국왕도 사절단을 보내어 범죄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고도 한다. 일본 정부는 살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정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만행이기 때문이다. 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살해범들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후 출세가도를 달린다.
행동대의 핵심인물이었던 시바 시로는 정치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수차례 당선된다. 낭인 동원책이었던 이다치 겐조는 일본 내각의 내상에 오르고... 그 외에도 살해범 대부분은 일본에서 전치요직에 앉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 살해음모를 총지휘한 거두였다.
러시아인 시바타의 증언 "그들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왕비가 누구인지 왕비가 어디있는지에 대해서만 물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녀는 일본의 침략음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방세계 즉 러시아나 프랑스 및 미국 등과 가까이 지내라고 한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조선 침략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장악하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건다. 명성황후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고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조선의 외교관계에서 철저히 베제당한 일본으로서는 명성황후는 눈에 든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명성황후의 살해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고 국제적으로도 일본은 비난여론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명성황후 제거작업은 전술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그리고 11월22일 명성황후에 대한 성대한 장례를 치르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하던 중 "궁중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원수를 갚지 못하고 거상기강이 지났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가눌 길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비극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지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용의자만 있을 뿐 지금까지 범죄자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규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이제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다시 가리고 규명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역사의 왜곡만 일삼는 일본에게 그 진실이 무엇이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도록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