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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교수 제공> |
홍산문화 지역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유물. <국학원 제공> |
기원전 3500년께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통상 청동기대에나 출현 가능한 흔적이다. 무엇보다 가면과 옥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는 주장이 잇따라 이곳이 단군신화 속 곰 토템을 지닌 웅족(웅녀)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동기 문명을 갖고 이주한 환인족(부계사회)과 웅족(모계사회)의 결합을 통해 단군조선이 건국됐다는 설이다. 문제는 여지껏 이를 확증할 사료가 없다는 점. 하지만 재야 학자들은 이를 대신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정황증거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붉은산 인근의 후기 신석기문화
위_ 삼좌점 터에서 발굴된 성벽. 움푹 튀어나온 ‘치’ 는 고구려 고유의 축성양식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발굴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형 집터. 대문과 문설주는 물론 곡식창고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이곳 60여 채의 군락은 매우 드문 큰 규모로 파악된다. <국학 학술원 제공> |
이와 같은 주장에 불을 댕긴 대표적 학자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 문화·사상사를 통해 한민족 원류를 밝히는데 힘써온 그는 “홍산문화를 직접적으로 단군조선 원류로 거론하긴 아직 이르지만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홍산문화 전문가도 “결국 중국은 이곳을 한민족 원류로 인정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대체 홍산문화란 무엇인가. 홍산(紅山)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의 이름. 몽골인은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붉은 산’을 의미한다. 실제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산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붉은산 인근에서 중국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 삼위일체의 거대 후기 신석기문화가 발견됐다.
상식을 깨고 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이다. 홍산문화란 명칭은 적봉시 홍산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발견된 대규모 유적은 넓게 퍼져 있다. 요녕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를 포괄한다.
우 교수에 따르면 그 시작은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중국 동북성 남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1400km의 요하 모습. 이 강을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이 나뉜다. <국학 학술원 제공> |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 왜소한 체구로 동북지방 한파를 뚫고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오늘날 동북공정의 첫 삽을 양사영이 뜬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다. 일본편입이 목표였다.
‘천부경’의 비밀 간직한 유적들
위_ 삼좌점 유적지의 문설주들은 매우 정돈된 모습으로 고대 국가의 통치력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유적터의 곡식창고. <국학 학술원 제공> |
처음 청동기 문명 발굴에 초점을 맞춘 발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시대 이전(신석기 시대)으로 옮아갔다. 신석기 주거지 31곳과 옥구슬 380여 기, 골기(骨器) 33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광복 이후 1955년 홍산문화라 이름 붙일 당시까지도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능원현과 건평현(建平顯) 경계 ‘우하량(牛河梁)’에서 유물이 대거 발굴되며 세계 언론은 ‘미지의 왕국’이 등장했다고 요란을 떨었다. 일본 신문 ‘아사히’ ‘마이니치’도 ‘5000년 전 신비의 왕국이 베일을 벗었다’고 대서특필했다. 발굴은 인근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새로운 신석기문화라는 것. 황하 유역 앙소문화 등과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관계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덕분에 세련된 채도문화와 거석문화, 세석기문화와 빗살무늬토기 등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요하지역은 만리장성 이북으로 전통적으로 이민족 역사의 장이었다. 우실하 교수는 “퉁구스계열 토착세력의 흔적으로 이를 웅족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며 “중국 측은 이를 전설의 인물 황제와 손자인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설정해 억지로 중화문명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사실 누가 이 문명의 주인이라 단정하기보다 동북아 공동문명권의 모태문화로서 공동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이 에게해 문명을 그리스만의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구려 축성방식의 원형도 발견
홍산문화지역에서 출토된 원형제단. 천손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국학원 제공> |
단군조선 건국의 밑바탕을 이룰 가능성이 농후한 홍산문화. 우 교수에 따르면 이곳에는 민족 최고 경전인 ‘천부경’의 비밀도 숨어 있다. ‘1, 3, 9, 81’을 내포한 유물이 수없이 발굴된다는 얘기다.
천제단과 무덤, 사당구조가 3층인 점, 용 모양 곡옥이 9개 한 세트를 이룬다는 점도 그렇다.
천제단구조도 그렇다. 이곳에서 발견된 천제단은 자금성의 천단과 구조가 동일한데 천단은 한족이 아닌 청나라 때 만주족이 건설한 것이다. 천단은 북방 샤머니즘 고유 사유체계인 ‘3수 분화의 세계관’을 형상화한 것으로 첫 번째 원이 9개의 대리석, 마지막 원이 81개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원형제단도 비슷한 구조다. 이는 음양 2분법적 중국 고유 사유체계와 다르다.
무엇보다 적석총 무덤양식은 바로 고구려의 그것이다. 현재 일반인에게 유일하게 공개되는 우하량 제2지점에선 지금도 직경 20~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과 적석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중국측도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1973년 장강 하류에서 앙소문화(황하문명)보다 이른 시기의 하모도문화가 발견되면서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하모도문화로 설정했지만 우하량유적(홍산문화) 발견 직후 이를 엮어 중국 3대 문화로 보고 있다. 특히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칭하며 중화문명의 새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요녕성 박물관 앞에 ‘3황5제 시대는 다민족 통일 국가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뤘다’고 적고 홍산문화를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못박았다. 이는 동북공정의 하부공정인 웅녀공정, 고구려공정보다 진일보한 움직임이다.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 바로 위층 하가점 하층문화. 황제족(한족)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층 위에 중국 최초 국가인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다.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 출범과 연계시킨다. 청동기를 개발한 3000여 명 환웅세력이 웅족과 결합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다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이 지역 청동기의 추정연대인 기원전 2400년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이 고조선 초기 강역이었다는 점에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최근 홍산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온 유임현 국학학술원 사무총장은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곳 유적 중 일부를 대동강 일대에서도 봤다’고 증언했다”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그들도 이곳이 기존 한족 문명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또 “이곳은 중국 송대 이후에야 중국 양식의 무덤이 발견되는 고구려 비사성 자리였다”며 “과연 중국의 역사 문화권인지 의심스럽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중국 사서들이 외국인으로 분류했던 동이족의 원형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게 유 사무총장의 해석이다. 그는 “중국측 교수가 ‘모호한 유적이 발굴되면 이전에는 그냥 덮어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전해 이와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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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초 홍산의 모습. 전봇대와 고압선탑이 전경을 망치고 있다. <국학 학술원 제공> |
중국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최근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음하 상류 ‘삼좌점 유적’.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되는 이곳의 발굴은 극비리에 이어져 올해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유 사무총장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보고 돌아와 전한 이곳 실상은 가위 충격적이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는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곽은 고구려의 그것과 다름 없다.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와 석회를 이용한 담벽 등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내성 북쪽 성벽의 ‘치’가 눈길을 끈다. 성벽이 쑥 튀어나왔다 들어간 치는 적을 수비하는데 유리한 양식으로 고구려 특유의 것이라 한다. 축성방식도 초기 고구려 축성방식보다 살짝 뒤져 있다. 곳곳엔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
고조선 시대와 겹치는 하가점 하층에서 출토된 청동투구(위), 홍산문화지역에서 출토된 여신상. 가부좌를 튼 채 두손을 다소곳이 모은 형상은 중국 여타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국학 학술원 제공> |
“기존 연구로는 동북공정 못이겨”
반면 대표적 재야 사학자로 분류되는 윤내현 단국대 교수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우리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빈발하는데 어떻게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역사를 중국학자에게 이해시키겠느냐”고 질타했다.
그는 이어 “기존 사학계 연구로는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윤 교수는 하가점 하층문화에 대해선 “독자적 문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주와 요서·요동을 합한 공통의 문화”라며 “북경 근처 갈석산까지 고조선 영토였음을 감안하면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지만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문화 등도 간과하면 안 된다”며 중립적 견해를 견지했다.
모두 취합해도 A4용지 한장을 넘기기 힘들다는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유적들은 어떤 해결점을 제시할까.
한민족 기원과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민족 정체성 확립과 남북한 통합,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하는 가장 좋은 대처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동북공정 속에 그려진 고조선
중국이 고구려는 물론 발해, 나아가 고조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영이라 주장하는 중국 사학계의 주장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자 동래설 등을 근거로 고구려 이전 단계에서부터 중국사에 우리 민족사가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해 중화적 우위성을 강조하고 고조선-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태양 숭배 신화인 ‘탕곡신화’와 ‘명이’라는 표현이 조선(朝鮮) 명칭의 기원이라 주장한다. ‘산해경’에 나타난 탕곡이 조선의 명칭이며 ‘주역’에 나오는 명이가 은나라 시대 조선 명칭이란 것이다. 또 3황5제 신화 속 황제의 후손인 전욱고양의 신화가 동이족 문화이고 곧 고구려 문화라 주장한다.
이런 중화우월주의는 ‘기자 동래설’에서 극에 달한다. 은말 주초 은나라 신하였던 기자가 동쪽으로 피난해 조선의 왕이 됐다는 기자조선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중원민족이 동북민족의 원류가 된 계기로 설명한다.
이는 1차 동북공정 중 장벽파의 ‘기자여기자조선연구’에서 본격화됐다. 기자조선은 은나라 후예가 조선반도에 세운 지방정권으로 실재했던 철학가·정치가인 기자에 의해 중국 동북사가 시작됐다고 본다. 또 기자조선은 주·진의 속국으로, 이후 위만조선은 한의 속국으로 분류한다. 민족적 기원으로는 숙신·예맥·동호계로 동북지방을 3분하고 ‘모두 중국 역사 범주에 존속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중국 측 주장은 우리 민족과 관련된 구체적 역사를 보편성과 연결지어 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국내 학계의 반론. 무엇보다 단군신화를 중국신화에 나타난 ‘신성한 존재의 출현이 초인간적 상황 속에 전개된다’는 일반론을 바탕으로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단군신화 속 곰 숭배 사상이 한국 신석기문화 속 고아시아족의 특징임을 망각한 것이다.
또한 중국사료인 ‘상서대전’ 등에 기록된 기자동래설은 다른 사서에선 일절 언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 일부 유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고조선의 청동문화는 중국과 계통이 다른 비파형동검과 돌널무덤 및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논리상 맞지 않다. 최근 일부 국내 학자들은 오히려 위만조선이나 한군현 등을 고조선 서쪽 변방에 자리한 고조선의 속국이라 보고 있다.
한편 중국 측 동북공정에 대해선 학계·정치권의 자성 목소리가 높다. 김정배 전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논문에서 “관심이 많은데도 고조선에 관한 연구가 부진한 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해석을 과감히 표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아비판한 바 있다.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도 “동북공정의 문제는 단순히 역사왜곡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정치·외교력 부재를 드러낸 것”이라며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 조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이버 의병이 역사 지킨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한민족에겐 늘 구세주와 같은 손길이 있었다.
격분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국가와 운명을 함께한 ‘의병’이 그것이다. 현대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온라인’ 등 문명의 이기와 더불어 힘을 얻은 ‘사이버 의병(cafe.daum.net/ cybershinsi)이 그들이다.
현재 1만여 명에 달하는 사이버의병은 초·중·고·대학생은 물론 40~50대 중년층까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고 있다. 활동할 때는 황금색 태양 속 붉은 ‘삼족오’가 그려진 복장을 입고 다니기도 한다. 삼족오는 고구려 벽화나 유물에 그려진 세발 달린 까마귀. 한민족이 천손임을 보여주며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의 정신을 상징한다.
다음카페에 둥지를 틀고 역사왜곡 시대에 민족정기를 바로잡자고 의기투합한 사이버 의병. 활약상도 눈부시다. 심지어 ‘네어버 지식in’엔 ‘유행어·신조어’로 분류돼 ‘온라인을 통해 나라 사랑을 실천하는 누리꾼을 지칭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들이 활동을 개시한 것은 2003년 12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동북공정)을 저지하기 위한 국학원청년단의 ‘고구려지킴이’ 발족이 시발점이다. 이후 누리꾼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뤄졌고 지금은 고구려사 지킴이를 넘어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모임으로 승화됐다. ‘동북공정 저지 활동’ ‘태극기 생활문화 만들기’ ‘국조 단군 알리기’ ‘개천절 살리기’ ‘대한민국 국학 바로 알리기’ 등의 활동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굵직한 두 건의 성과도 올렸다. 우선 지난 9월 국학원이 중심이 된 ‘동북공정 저지 대국민 기자회견’ ‘국민대회’가 첫 번째 개가. ‘한민족 정체성 찾기 1000만인 서명’도 이어졌다. 올 10월에는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은 개천절 행사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대한민국 생일파티’라는 주제로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개천절 행사를 벌인 것.
“개천절이 어느새 국가 수장인 대통령도 외면하는 일부 종교행사로 치부되고 지난 20년간 언론에서도 철저히 외면당했다”는 현실을 뒤집을 수 있도록 ‘고개숙인’ 개천절의 의미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것이다. 이날 참가자들은 전통복식 대신 코스튬 플레이를 통해 동북공정 반대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고 대형 떡 케이크를 마련해 나눠 먹는 등 개천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장예령 사이버의병 단장은 “거창한 것은 아니고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정신을 갖고 활동한다”면서 “스스로 민족 정신사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자는 것인 만큼 누구나 활동 가능하며 온라인 카페가입으로 정회원 자격이 부여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
<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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