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장의 음반 취입 내달부터 전국 투어
19세 데뷔땐 나도 발랄…동백아가씨 부를때부터 촌스럽단 얘기 들어
집에선 가수아닌 주부…이미자 남편으로 지낸 우리집 양반에 미안
누구나 자기 길 있는 법… 그때 패티김 따라했다면 난 그분 밑에 있는 셈
'엘레지 여왕' 이미자는
이미자씨는 4월 2일부터 사흘간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을 한다. 공연 타이틀은 '세상과 함께 부른 나의 노래 101곡'이다. 전국투어도 예정되어 있다.
50년 세월 동안 그녀는 2069곡을 발표했고, 560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그녀는 "내 목소리는 세월 속에서 많이 변했다. 음폭은 넓어졌지만, 과거처럼 카랑카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는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1958년 국내 첫 TV방송 HLKZ의 콩쿠르 프로그램에 가요부문 1등을 차지해, 이듬해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 그때 우리나이로 열아홉살이었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것은 '동백아가씨'(1964년). 신성일과 엄앵란이 출연한 같은 제목 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영화가 뜨면서 노래가 대히트를 쳤고, 그 당시에 100만장 이상 팔렸다. 그러나 1965년 말 '왜색조(倭色調)'라는 이유로 방송 및 음반 판매가 금지됐다.
그녀는 "1970년대 말 일본의 후쿠다 수상이 왔을 때 청와대 영빈관 연회석상에 불려갔다. 그때 내가 불러야 할 지정곡이 동백아가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금지곡이 된 줄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시절 다른 히트곡인 '기러기 아빠'는 '비탄조'라는 이유로, '섬마을선생님'은 '표절'이라는 이유로 방송과 음반판매가 금지됐다. 이들 금지곡은 모두 1987년 풀려났다.
이미자씨는 4월 2일부터 사흘간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을 한다. 공연 타이틀은 '세상과 함께 부른 나의 노래 101곡'이다. 전국투어도 예정되어 있다.
50년 세월 동안 그녀는 2069곡을 발표했고, 560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그녀는 "내 목소리는 세월 속에서 많이 변했다. 음폭은 넓어졌지만, 과거처럼 카랑카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는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1958년 국내 첫 TV방송 HLKZ의 콩쿠르 프로그램에 가요부문 1등을 차지해, 이듬해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 그때 우리나이로 열아홉살이었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것은 '동백아가씨'(1964년). 신성일과 엄앵란이 출연한 같은 제목 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영화가 뜨면서 노래가 대히트를 쳤고, 그 당시에 100만장 이상 팔렸다. 그러나 1965년 말 '왜색조(倭色調)'라는 이유로 방송 및 음반 판매가 금지됐다.
그녀는 "1970년대 말 일본의 후쿠다 수상이 왔을 때 청와대 영빈관 연회석상에 불려갔다. 그때 내가 불러야 할 지정곡이 동백아가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금지곡이 된 줄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시절 다른 히트곡인 '기러기 아빠'는 '비탄조'라는 이유로, '섬마을선생님'은 '표절'이라는 이유로 방송과 음반판매가 금지됐다. 이들 금지곡은 모두 1987년 풀려났다.
- ▲ 이미자씨는“한때 히트곡마다 금지곡이 되자‘나보고 노래 부르지 말라는 건가’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잘 참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자꾸 잊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노래인생 50주년' 기자회견에서도 그녀는 "난 촌스러운 사람이고 촌스럽게 남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본래 서울 출생이다.
―가수로 데뷔한 19세 시절에는 결코 촌스럽지 않았겠지요?
"아, 그때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발랄했지요. 데뷔곡 '열아홉 순정'(1959년)은 경쾌한 스윙템포의 음악이었죠. '동백아가씨'(1964년)가 나온 뒤로 사람들이 '촌스럽다'고 했어요. 저를 '뽕짝 가수'로 불렀지요. 미니스커트, 장발, 팝송, 재즈, 발라드 등 서구풍이 들어와 유행하던 때라, 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수준 낮은 사람으로 취급했어요. 내 공연에는 '고무신 신은 아줌마들만 온다'고도 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나요?
"솔직히 흔들렸고, 노래를 바꿔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요. 그렇게 못한 것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주변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앞에 나서 개척하는 쪽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뒤에서 가만히 따라가는 쪽이었지요. 그러면서 '난 어떤 노래도 소화해낼 수 있지만 발라드풍 가수들은 내 노래를 나처럼 감정 넣어 부를 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지요. 세월이 지나고 보니 '뽕짝 가수'로 살아온 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요."
아마 20년 전까지도 그녀는 '촌스러운 것'에 대해 당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가 1989년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려고 했을 때도, "당신 노래에는 질 낮고 수준 낮은 관객들이 올 것"이라는 이유로 대관(貸館)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정말 처참한 기분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녀는 당시 고건 서울시장을 만나 '재작년(1987년)에 내 금지곡들이 해금(解禁)이 됐다. 그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싶으니 한을 풀게 해달라'고 사정해 공연은 겨우 성사됐다고 한다. 그 공연에는 4당(黨) 총재 부부가 모두 참석하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 ▲ 1964년 발매된 공전의 히트곡‘동백아가씨’앨범 재킷(왼쪽), '한국대중가요 60년 60인의 스타전(展)'에 전시된 앨범(오른쪽).
"당시 '동백아가씨'가 100만장 이상 팔리는 대히트를 하면서, 비애와 한(恨)을 담은 그런 노래들만 내게 주어진 겁니다. 내가 그 나이에 인생의 깊은 면을 알았다기보다 노래 가사의 감정을 잘 살려 표현했던 게 아닌가. 나를 데뷔시킨 작곡가 나화랑 선생님이 '가사 전달이 정확해야 하고 가사의 내용대로 감정을 실어라. 가사가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불러라'라고 주문했어요."
햇볕에 그은 얼굴, 주름들, 세월로 인해 검게 염색한 머리, 왜소한 체구로 이뤄진 그녀가 과거 시절을 말할 때면 우는 것이 아닌데도 눈빛은 젖어 보였다.
―혹시 천성이 슬픈 것을 좋아합니까?
"그건 아니나, 나는 활동성이 있지는 않아요. 일이 없으면 집에서 조용히 있어요. 과거에는 뜨개질을 그렇게 많이 했어요. 친구들끼리 어울려 나돌아다니지를 않아요. 실제로 한두명 빼면 내겐 친구도 없어요."
내가 "그런 분이 어떻게 십대부터 가수가 되겠다고 쫓아다녔습니까?" 하자, 그녀는 "그건 내 염원(念願)이었으니, 가수 하겠다는 용기는 있었나 보지요"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름 앞에 따라붙는 '엘레지(悲歌)의 여왕'이란 빛나는 타이틀은 누가 지어줬나요?
"'동백아가씨'가 나온 뒤 제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어요. 지금의 제 나이도 아니고 갓 나온 20대 가수의 일대기라는 것이 너무 우스운데, 그때는 멋모르고 너무 어려서, 그냥 영화 스토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영화는 장삿속으로 내 성장 과정의 가장 아픈 부분을 과장되고 처절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너무 속상했지요. 영화 내용은 그렇지만 그 타이틀 자체는 불만이 없어요."
―데뷔 연도가 같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패티김에 대한 경쟁의식은?
"당시는 그분의 전성기였어요. 미모와 노래실력이 뛰어난데다 세련됐고 외국 생활을 해 무대매너도 너무 좋았어요. 내게 없는 걸 갖추고 있었으니,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난 저렇게 될 수 없을까' 하는 부러운 존재였고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그분처럼 따라간다면 그분 밑에 있게 된다는 걸 알았어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는 것이지요."
―지난번 '노래인생 50년' 기자회견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주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요? 평범한 주부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빼어난 가수를 갖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주부를 할 수 있다고요? 저는 주부를 여성의 대표라고 봅니다. 인기를 얻어 유명해져도, 가정이 없으면 허울만 좋은 것이지요."
―재혼한 뒤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갈등은 없었어요. 그건 아닙니다. 시어머니는 완고하고 과묵한 분이었지요. 내가 바쁜 가수생활을 하다가, 전혀 살림을 모르고 종손(宗孫) 집안에 들어오니 너무 힘들었지요. 제사(祭祀)가 있으면 집안 사람들이 40명 이상 모입니다. 부침개만 두세 광주리씩 부치고 제사 음식을 만들어 상(床)을 차려야 하는데, 해보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내가 가정을 얼마나 잘 꾸려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도 있었지만, '무엇이든 어려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서 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다짐을 많이 했지요."
―진정 예인(藝人)이라면, 그런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로 갔을 텐데요.
"내가 초혼(初婚)에 실패하고 나니까, '가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의 낙오자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집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어요. 집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가수가 아니고 주부입니다. 그렇게 쭉 살아왔어요."
―만약 노래와 가정 중에 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요?
"노래와 가정…, 지금에 와서 둘 중 하나를 묻는다면 말할 수 없어요."
―자신의 유명세로 가려진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통장, 집문서에 이 선생의 명의는 물론 남편과의 공동 명의로도 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제 이름으로 하는 것을 피해왔어요. 우리가 공식석상에 함께 나갈 때, 옆에 있는 분이 '누구의 부인'이 아니라 '누구의 남편'이 됩니다.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이분은 자존심 상한 적이 많았을 겁니다. 나는 '남편'이란 말도 안 썼어요. 그 말이 좋지 않게 들릴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집 양반', '우리집 주인'이라고 했어요. 세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디지털 시대가 왔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 맞아요."
―한 음악평론가의 말로는 '당일 곡을 받아 가사를 외웠고 음반취입을 했고, 미모도 율동도 안 되지만 마이크 앞에서 똑바로 서서 노래 하나로만 대성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요즘 세상이었다면 과연 성공했을까요?
"노래는 타고나야 하는 것은 맞아요. 아버지 친구분들이 한잔하고 유행가를 부르면 다음날 이 조그만 애가 그 노래를 전부 외워서 구성지게 불렀어요. 그때는 오로지 라디오밖에 없어 노래만 잘하면 됐지요. 하지만 요즘은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모습이 좋아야 되고 그 모습을 갖추기 위해 경제적 뒷받침도 있어야 하지요. 요즘 세상이라면 내가 지금처럼 되기가 어려웠겠지요."
―이제 젊은 가수들은 "이미자 선생님처럼 오래도록 노래하고 싶다"며 이 선생을 찾습니다. 당사자로서 어떤 기분이 듭니까? 50년 세월 동안 '같은' 노래를 부르면 지겨움은 없을까요?
"듣는 입장에서, 내 노래를 지겹게 듣는 분이 많은가요? 나는 노래를 계속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정말 좋아해 주시기 때문에 그 성원에 힘입어 오늘날이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늘 무대에 섰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앞서 말한 1989년 데뷔 30주년 세종문화회관 기념 공연과, 첫 월남파병 부대였던 비둘기부대에 위문공연을 갔던 때지요. 가면 죽는다고 다들 안 가려고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를 위문단에 넣었어요. 당시 우리 국적기가 없어, 사흘 만에 사이공(호찌민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부대에 갔더니 사단가(歌)가 '동백아가씨'였어요. 장병들의 이글이글 거리는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아직 생생해요. 그 무대 위에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고, 완전히 눈물바다가 됐지요. 그건 잊을 수 없더라."
그녀의 눈자위가 젖었다.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좋은가요?
"그건 아니고…. 지금이 낫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못 알아들어요. 나도 이들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지만."
―잘 살아왔지요?
"잘 참고 살아온 것이지요. 사람이 사는데 속상하지 않고, 기쁜 일만 있을 수는 없지요. 그러니 참고 견디어왔지요. 혼자 가슴에 새겨 넣고…."
-
- ▲ '엘레지의 여왕(女王) 가수 이미자(68)씨가 자신의 노래인생 50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진부 민봉기 기자
입력 : 2009.03.09 03:42 / 수정 : 2009.03.09 14:21
'경제,사회문화 > 사회 ,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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