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표면부터 1㎚ 단위로 파헤치는 표면분석 기법 잉크와 인주의 시간차 가려
페인트 조각만으로 차종·출시연도 구별 뺑소니 추적에도 활용
계약 내용이 적힌 종이에 도장을 찍은 것인지, 아니면 도장을 찍은 백지 위에 계약내용을 인쇄했는지는 맨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어 자칫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있지도 않은 차용증을 진짜 도장을 사용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서 진짜 도장을 사용한 가짜 차용증을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 같은 원리를 이용해 뺑소니 차량의 정체를 페인트 조각만으로 알아내는 기술도 나왔다.◆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1㎚의 삽질
거액을 빌려줬다는 차용증이 있다. 채무자로 몰린 사람은 돈을 꾼 적이 없으니 그런 차용증도 당연히 작성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채권자는 차용증을 증거로 민사 소송을 걸겠다며 돈을 갚으라고 주장한다.
조사 결과, 차용증에 날인된 도장은 진짜였다. 채무자로선 꼼짝없이 거액을 물어 주게 생긴 것이다. 채무자로 몰린 사람은 차용증이 일반 계약서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계약서 내용이 인쇄된 종이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 도장을 먼저 찍은 후에 계약서를 인쇄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도장의 인주가 프린트 잉크를 덮고 있는지, 아니면 그 아래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둘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현미경으로 확대해도 두 색이 겹쳐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시간이 지났거나 서류가 꾸겨지기라도 했다면 더더욱 구별하기 어렵다.
프린트용 잉크나 도장 인주의 두께는 통상 수㎛(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여서 세슘 이온을 사용하면 종이 표면 가장 위쪽에 찍힌 인주나 잉크만을 안전하게 골라 올릴 수 있다. 이연희 박사는 "세슘 이온이 긁어 낸 물질을 질량 분석기에 넣으면 잉크와 인주 중에 무엇이 가장 위에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질량 분석기는 원자들의 질량을 측정해서 특정 물질이 어떤 원자로 구성됐는지를 알려주는 장치이다. 이 박사는 관련 연구결과를 지난 1월 국제학술지 '응용표면과학(Applied Surface Science)'에 발표했다.
◆뺑소니 차량 추적에도 활용
표면분석기는 인주 분석에도 유용하다. 계약서에 묻어 있는 소량의 인주가 표면분석기를 사용해 어떤 회사 제품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만일 같은 날 작성한 여러 장의 계약서에 찍힌 인주가 동일한 회사 제품이 아니라면 서류는 진본인지를 의심받게 된다. 이연희 박사는 "국내에 시판되는 국내산·중국산 인주의 성분 분석을 마쳤다"면서 "특정 인주가 어느 회사 제품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표면분석기를 활용하면 뺑소니 차량을 추적하는 데 드는 인력과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다. 뺑소니 차량은 사고를 내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단서가 되는 것이 뺑소니 차량의 페인트뿐이다.
차량을 칠한 페인트로 차종과 출시연도를 구별할 수 있다. 통상 차종별로 5겹의 페인트를 칠하는 데 동일 차량이어도 출시된 해에 따라서 조금씩 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KIST 이강봉 박사는 "체어맨·그랜드 카니발·베르나·모닝 등의 차종별 색상에 따른 페인트 분석을 마쳤다"며 "1㎎의 페인트만 남아 있어도 차종 분석이 가능하다"며 "다만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차량의 도색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