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37) 베트남 시찰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8

제1話 溫故知新 (37) 베트남 시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베트남전과의 두 번째 인연은 1966년 백마부대까지 전개해 놓고 육군본부 작전처장(준장) 시절 육·해·공군 장교단을 인솔, 베트남 전선을 시찰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당시 나는 시찰단장으로 염태복(廉泰復·해간3기·준장 예편)해병대령·배옥광(裵玉洸·해사4기·소장 예편)해군대령 등 10여 명의 장교를 이끌고 10여 일의 일정으로 전선을 둘러봤다.

우리는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만든 일정표에 따라 주월사, 맹호·백마·해병대 청룡 등 전투부대와 비둘기(공병)·십자성(군수지원) 등 주요 부대를 모두 방문했다. 시찰 당시 인상적인 것은 부대마다 주한미군 수준의 PX가 마련돼 있는 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냉장고·텔레비전 같은 가전제품이 귀한 시절이었는데 베트남에서는 이같은 고가품의 구매 티켓을 전공(戰功)을 세운 사람에게 줘 포상했다.

하루는 예하부대 PX를 순시하는데 날더러 품목을 지정하라고 권했다. 나는 “전공자에게 줄 것을 잠깐 방문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사양했는데 하도 강권해서 마지못해 작은 플래시를 받아온 기억이 난다. 또 주월사령관 채명신(蔡命新·육사5기·중장 예편)소장은 내가 떠날 때 “무더운데 수고했다”면서 “온 김에 부근 동남아 관광이라도 하고 가라”며 얼마간의 여비를 달러로 건네주었다. 물론 당시 나는 특명검열 같은 임무를 띠고 간 것은 아니었지만 공적인 임무를 띠고 갔기 때문에 관광 권유는 사절하고 여비만 받았다. 얼마 안되는 촌지였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개인이 달러 소지를 못하게 돼 있어 달러가 귀했다.

전투병력을 처음 보낸 3차 파병 때 맹호부대장·주월사령관을 겸임한 채소장은 맹호부대장을 마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근무하다가 맹호부대가 파월부대로 선정되면서 다시 맹호부대장으로 임명, 베트남으로 파병됐다. 군에서 6·25전쟁 때의 전투 및 유격전 경험이 풍부한 점을 감안, 일부러 채장군을 발탁해 격을 낮춰 보낸 것이다.

원래 제1야전군사령부에서는 제27사단을 파월부대로 선정, 추천했다. 그런데 국방부·육군본부가 몇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파월 첫 전투부대를 전투서열 1위인 맹호부대로 결정, 사단장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채소장을 임명한 것이다. 이로써 채장군은 초대 맹호부대장 겸 주월 사령관으로 베트남에서의 부대 편성·훈련·전투 등 전권을 행사했다.

당시 우리의 시찰 목적은 맹호·청룡·백마부대 전개 이후 이 병력이 충실히 임무수행을 하고 있는지, 현지에서의 애로사항은 뭔지, 본국에서 지원할 것은 없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장병들이 유·무선을 이용, 세계 어디든지 자유롭게 통화하는 세상이지만 당시 우리가 접한 지휘관들에게서는 처음 해외 출병을 하다 보니 본국과의 의사소통문제 개선을 요구하는 의견이 많았다.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지금도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고, 나는 파병 결정에 관여한 바 없지만 당시의 안보상황에서 파병했기에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한국의 의견(발언권)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또 한국은 참전의 반대급부로 예비사단 창설 및 군장비의 대폭 지원을 받게 됐다. 미국은 베트남전 참전을 계기로 10개 예비사단의 장비를 편제할 수 있도록 군원(軍援)을 허용했다. 현역사단은 더 이상 늘릴 수 없어 유사시 예비군을 동원, 부대를 편제하는 예비사단 10개 규모의 장비를 지원받은 것이다. 따라서 국가안보 측면에서 파병은 잘한 결정이었다.

2003.06.02 정리:김당 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