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21사태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일련의 도발로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 아래 한·미 연합군은 강력한 대북 경고 차원에서 실전을 방불케 한 대규모 공수(空輸) 공격훈련(포커스 레티나)을 전개했다. 그러나 미군의 막강한 전력을 과시한 지 한 달도 채 안돼 `하늘의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미 해군 EC-121 정찰기가 1969년 4월15일 오후 2시쯤 청진 남동쪽 152㎞ 상공에서 북한 미그기 2대에 피격돼 추락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워닝 스타(warning star·경고의 별)라는 애칭을 가진 이 정찰기는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이날 오전 7시 정찰임무를 띠고 일본 아스키 해군기지를 이륙한 지 7시간 만에 사고지점에서 연락이 끊겼다.
북한은 이 사건 발생 후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 영공을 침범한 미군 정찰기 1대를 추격,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방부는 이에 맞서 “EC-121기는 북한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이 항공기는 항상 공해 상공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이를 위협하거나 방해할 권리가 없으며 더구나 격추행위는 말도 안된다”고 반격했다.
EC-121 정찰기 피격 사건은 출범한 지 넉 달 밖에 안된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 첫 번째 외교적 시련을 안겨주었다. 닉슨 대통령은 사건 당일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 보좌관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나 국가안보회의를 소집, 대응책을 협의했다. 당시 미 의회 내에서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 정부 또한 1년 전에 나포된 미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0여 명이 귀환한 지 넉 달 만에 터진 `하늘의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안과 사건 처리과정을 예의 주시했다.
나포 사건과 달리 정찰기 피격 사건의 경우 승무원 31명의 생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무엇인가 터질 듯한 긴박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판문점에서 공산 측 요청으로 제290차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군사정전위 회의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자 닉슨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과 주한미군 수호를 위해 정찰비행을 재개하고 무장엄호를 명령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런 조처는 도발에 대한 중간조처이고 미국의 최종태도는 미국의 항의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이어 EC-121기 피격 뒤에 편성한 71기동함대를 증강, 동해의 정찰비행 보호임무를 맡김으로써 강력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주축으로 40척의 함정으로 편성된 71기동함대는 동해에 진입,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닉슨 대통령은 이같은 무력시위 경고조처를 취한 후 북한이 또다시 미군 정찰기를 공격할 경우 아무 경고 없이 철저한 보복조처를 명령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제로 EC-121기 사건 후 닉슨 대통령은 북한을 즉각 응징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했다.
당시 미국의 유력지 뉴욕 타임스는 닉슨 대통령이 북한의 군사목표 두 곳을 선정, 이를 강타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미국 국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보복조처를 설명하는 연설문까지 준비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응징조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신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닉슨과 그의 참모들이 북한을 보복 공습하는 것이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베트남전을 확전으로 이끈 1964년의 통킹 만 사건 이후 월맹에 가해진 보복공습과 동일시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분석했다.
그로부터 석 달쯤 후에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대(對)아시아 외교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예고하는 괌 독트린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미국이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