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8>후방군인이 해야할 세가지 중 하나-103-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2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8>후방군인이 해야할 세가지 중 하나-103-

육본 인사참모부에 인사운영감실(미국식 OPO)을 신설, 개인 교육 기능을 인사참모부에 이관했다. 그동안 개인 교육 기능은 G3(작전참모)에서 관장해 왔는데 성격상 맞지 않다고 판단, 인사참모부로 이관시킨 것이다. 각 참모부에 기획(plan) 기능과 계획(program) 기능을 강화하는 ‘혁신개혁안’도 마련했다. 육본이 고등 정책을 수립하고 방침과 규정을 선포하는 주 기능에 맞춰 제도와 구조를 개편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금호동 이웃에 살며 통근 버스를 함께 타던 조승현(포사1기·대령 예편)중령과 인생 노정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육본에 먼저 근무한 선임자로서 최중령에게 하나 권하겠소. 후방에 근무하는 동안 세 가지 중 하나는 꼭 마스터하도록 목표를 세우시오. 첫째 진급을 하든가, 둘째 돈을 벌든가, 셋째 공부하든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요.”

군인이 돈을 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금호동 산비탈에 9평짜리 집을 지은 것도 어렵사리 이루어진 일인데 돈을 벌다니 꿈 같은 얘기다. 자유당 말기, 동대문 시장 일대의 바라크촌을 강제 철거하면서 그곳 주민들을 금호동 산 일대에 가 살도록 철거민 이주지를 지정해 주었다. 이 틈을 타 누구든지 금호동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살 수 있었다.

이때 철거민 수용지 지정 소식을 들은 서울대 출신의 부하 안태화군이 나를 찾아왔다. 그가 제대한 뒤에도 나를 찾은 것은 군납업체인 용달사에 근무했기 때문에 인근 부대를 방문하면서 안부를 살피기 위해 나의 부대도 찾아주곤 했는데 어느 날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서라도 서울에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것이 좋겠다”며 금호동 철거민 수용지 지정 소식을 알려 준 것이다.

“대대장님, 그런 집을 까치집이라고 하는데 후닥닥 까치집 하나 지어서 피난민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마시고 가족들만은 정착해 살도록 하십시오.”

“돈이 있나.”“그 돈이 몇 푼이 든다고 그러십니까. 땅만 사면 집 짓는 것은 판잣집이니까 얼마 안 드는데요.”사실 나는 집에 대한 절박성이 없어서 그렇게 대꾸했는데 안군이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가만히 계십시오. 나도 방이 하나 필요하니까 같이 합자해서 짓죠. 대신 나한테 방을 한 칸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지은 집이 9평짜리 미니 2층집이다. 판잣집일망정 멋을 낸다고 미국 포병학교 유학 시절 서양집들을 보아 온 경험을 살려 집 두 채로 보이게 하고 남쪽으로 방을 두 개 내는 등 멋과 실용성을 살려 지었다. 그러나 산비탈 바위산인지라 평지로 닦아 봐야 18평도 안 나오는 대지에 판잣집을 이층으로 덩그렇게 세워 놓으니 불안해서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발을 헛디뎌 한 번 구르면 50m 이상 구렁텅이에 처박히는 지형이어서 아이들을 기르는 데도 위험성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불안하다는 생각보다 ‘언덕 위의 양옥집’이라는 사치스러운 생각과 내 집을 비로소 가졌다는 안도감으로 가슴 뿌듯했다.

이토록 판잣집 하나 마련하는 데도 허덕거리는데 돈을 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제때 진급을 위해 혈안이 된 적도 없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 뿐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고 대대’나 ‘문제 대대’로 전속 명령이 떨어지면 으레 가는 것처럼 가서 정상화시키고 만족하는 것이 낙이었다.

물론 남들은 진급하는데 나만 누락될 때 자괴감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이 가난하면 괜찮지만 누구는 더 부자가 되고, 또 누구는 더 큰 감투를 쓰면 배도 아프지만 상대적 박탈감으로 마음이 쓰린 것이다. 그렇더라도 ‘진급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로구나’ 여기고 묵묵히 지내 왔을 뿐이었다. 충청도 ‘깡촌’에서 국졸 학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도 그저 고맙게 생각할 뿐이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