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6>육군대학 입교 -101-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1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6>육군대학 입교 -101-

1962년 7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단기 10차 6개월 과정이었는데 입교생은 육사 7, 8, 9, 10기와 갑종·현지 임관 장교로 구성됐다. 이중 현지 임관 출신은 나를 비롯해 3명이었다.

입교생들은 만나자마자 한결같이 “자네도 진급하러 왔구먼”하고 인사를 나눴다. 말하자면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진급하러 왔다는 것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고 100% 합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격한 시험 과정을 거쳐 합격·불합격 판정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부정시험으로 퇴교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적 불량으로 졸업식 때 졸업장 대신 백지가 통에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졸업식에 참석토록 하지만 합격 못한 것으로, 이들은 진급에서 제외돼 곧 전역했다.

나는 시내에 방을 얻지 않고 영내 BOQ(독신 장교 숙소)에 들어갔다. 시내에서 기숙하면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BOQ에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진해 보자고 작정한 것이다.아닌 게 아니라 3개월 후 실시된 중간 평가에서 나는 전 학과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다음 날 부총장인 장경석(육사5기·사단장)준장과 교무처장 정서윤(육사8기·사단장·준장 예편)대령이 나를 불렀다. 두 사람은 모두 포병 선배였다.

장부총장이 물었다.“최중령 성적이 대단히 좋은데 상호평가와 내무평가에서 점수가 좋지 못하단 말야. 왜 그런가.” 나도 이상했지만 그간의 공부한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정처장이 말했다.

“최중령이 공부를 위해 BOQ에서 독야청청한 것이 문제군. 당신이 육사 정규 출신이 아니고 현임 출신이기 때문에 동기생이 없고, 또 홀로 공부에만 매달리니 상호평가와 내무평가가 나쁠 수밖에. 공부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냐. 우등할 생각보다 호연지기를 기르며 광범위하게 동료를 사귀는 것이 중요해. 육대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동료들과의 친교와 우애·단합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그것을 배우는 곳이야.”

나는 아차, 싶었다. 물론 육대에는 각종 임관 출신별로 알게 모르게 서로 이끌어 주고 밀어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로 인해 정실평가나 편견의 평가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나는 곧바로 동료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몇 주 후에는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정처장이 현임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도저히 졸업을 못할 것 같다면서 나더러 별도로 과외를 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 중령을 매일 두 시간씩 개인 교습을 시켰다. 졸업식 날 나는 그의 졸업장이 들어 있는 통부터 열어 보았다. 그런데 다행히 백지가 아닌 졸업장이 들어 있었다. 그때의 안도의 한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끝내 진급하지 못한 채 중령으로 예편하고 말았다.

육대 졸업을 1주일 정도 앞둔 날, 학교를 찾은 육본 인사참모부 보직처장과 면담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희망 보직을 받으러 상담차 온 것인데 내 차례가 돼 상담실로 들어서자 나는 깜짝 놀랐다.대전 2연대의 이등병 시절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곽철종(육사4기·사단장·준장 예편)일등상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등병 때 그를 통해 군인의 멋을 알고 그런 군인이 되고 싶었다.

“최중령, 오랜만이군. 공부는 잘했나?”“넷, 반갑습니다.”“사사로운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희망 보직을 말해 봐.”“넷, 육본 인사참모부로 가고 싶습니다.”“응, 희망 보직란을 보니 1번도 인사참모부, 2번·3번도 인사참모부로 돼 있군. 왜 그런가, 이유가 있나?”“넷, 있습니다. 저는 죽도록 중령 7년을 했고 내년 초 8년이 되면 계급정년을 하게 됩니다. 왜 진급이 안되는지 제가 한 번 들어가 일하면서 알아보려고요.” 그러자 곽장군이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