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5>“육사 출신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100-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1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5>“육사 출신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100-

당시 군에서는 정책적으로 상당수의 보병장교를 포병으로 전과시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장군으로 진급시킨 예가 있었다. 포병부대가 증·창설됐으나 포병장교의 부족으로 계급 공석이 많았다. 그래서 보병들을 단기교육시킨 뒤 포병으로 보내 대령·장군으로 진급시켰다. 나의 직속 상관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그 무렵 부대 장악력과 병사교육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전부일 사단장은 예전의 인연에다 나의 소문을 듣고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포병사령관에게 “부사령관으로서 예하 대대를 특별훈련시키겠다. 훈련 기간 동안 지휘권을 위임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포병사령관은 자신의 입장을 알았던지 선뜻 응해 주었고, 나는 곧바로 비상소집훈련과 포병 특기훈련(조포·측지·관측·주특기·통신·행군)에 들어갔다.

부하 장교나 병사들이 ‘죽었다 복창’ 했으나 나는 그들과 똑같이 숙식하며 훈련에 임했다. 먼지 날리는 광야와 메마른 산골짜기에서 함께 밤을 새우고 식사도 꼭 함께 했다. 엄하게 다스리더라도 동고동락하면 그들도 모든 것을 감내한다.마침내 2군단 ATT가 있던 날.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 포병사령부가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훈련 6개월 만의 성적이었다.

1등상을 받는 자리에서 군단 포병사령관 박병주(육사7기·사단장)대령이 나를 세워 놓고 말했다.“최중령은 과연 듣던대로야.”그런 성적 때문이었는지 나는 곧바로 육군대 입교 명령을 받았다. 대령 진급을 위해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었다.

나는 전속가는 기념으로 화천에서 셋방살이하고 있는 아내를 불러 화천 군인극장으로 갔다. 한참 영화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전부일 사단장이었다. 그도 다른 참모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보, 포부사령관이 내일 전속가는데 이게 뭐요. 너무 쓸쓸하오.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없구먼. 우리 나가 송별주 한잔 합시다.”일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이대로 보내기가 아쉬우니 좀 놓아주십시오” 한다.“금일봉까지 주셔서 요긴하게 쓰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송별회까지 해 주신다니 더욱 고맙습니다. 걱정 마시고 가셔서 한잔 하세요.”

아내도 흔쾌히 응낙했다. 나는 전사단장을 따라 화천의 기생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헌병참모와 함께 세 명이 기생을 각기 앉혀 놓고 한잔 하는 것이 혼자 영화를 보고 있을 아내에게 내내 미안했다. 전장군은 호탕하고 인정이 많고 남도 판소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취하면 그는 기생들과 함께 판소리를 걸판지게 부르는데 그 실력이 보통 수준을 넘었다.

그는 취중에도 ATT에서 1등한 것을 고마워하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육사 출신 아닌 것이 안타깝네. 정말 아쉬워. 육사 출신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이 말은 평생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가 됐다. 군인으로서 비육사 출신. 사람은 똑똑한데 현지 임관 출신인지라 진급에 어려움이 있고, 그것이 염려된다는 안타까움. 대령 진급이 늦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그는 나를 육군대에 입교하도록 남몰래 손을 써주었는데, 이런 숨은 음덕을 그는 그런 말에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모든 보직이 ‘지명 보직’이지 운동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군이 적성에 맞는 나에게는 어떤 것을 맡겨도 즐겁고 기쁠 뿐이었다. 그러니 어디에 손을 쓰고, 운동할 필요가 없었으며 진급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소장과 중령. 계급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전속 마지막 날 아내와 함께 쓸쓸히 영화를 보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사단장은 나를 데리고 나가 송별회를 열어 준 것이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전부일 장군과 같은 선배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