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7>육본 인사참모부 배속-102-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2
제2話 장군이 된 이등병<207>육본 인사참모부 배속-102-

항의 비슷하게 ‘만년 중령’의 설움을 얘기했더니 곽철종 준장은 너털웃음부터 터뜨리는 것이다.

“그래? 개인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가고 싶다면 문제가 있지만 대신 인사 구조상 문제를 발견해 좋은 대안을 제시한다면 괜찮지.”

“자신 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용기야. 제도를 고쳐 나가려면 자신감보다 용기가 필요해.”

그 말은 정착된 제도를 뜯어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그런 일에는 이해 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자리를 내놓는 모험이 따른다는 뜻이리라. 나는 이등병 시절 곽철종 일등상사를 군인상의 전형으로 흠모해 왔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늠름하게 별을 달고 있는 모습이 흐뭇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별다른 소득도 없이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설마 한마디 말로 희망 부서로 배속될까 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며칠 후 육본 인사참모부 발령을 받았다. 내 뜻대로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했던 것인데 이번만은 내 의사가 100% 반영된 것이다. 곽장군의 배려였음은 물론이다.

이등병으로 출발해 하사 - 상사 - 소위 - 대위 - 중령까지 이르는 동안 나는 야전군에만 엎드려 있었다. 이때의 나는 ‘먼지 군인’ ‘땀 군인’ ‘작업복 군인’으로 통했다. 그런데 번듯한 근무복을 입고 육본에 근무한다는 것이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 대부분 나름으로 진급 운동을 하면서 제 갈 길을 가는데 나는 그런 진급 문화·보직 문화에 문외한인 요령 없는 군인으로서 한때 나의 병적 기록이 과연 육군본부에 비치돼 있는지 의심했을 정도인데 바로 그곳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기뻐했다. 어린 자식들은 동네에서 놀다가도 퇴근해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면 쏜살같이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뻐기곤 했다. 그동안 강원도 철원군 지경리와 신망리, 경기도 연천군 전곡, 파주군 신산리, 강원도 화천, 전남 광주, 강원도 춘천, 서울 용산구 산판동, 혜화동, 신설동 등 무려 15차례나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아이들은 얼마나 주눅 들었던가.

금호동 산비탈에 9평짜리 집을 지어 비로소 내 집에서 살고 아침 7시면 재래시장 네거리로 내려와 육본 통근 버스를 타고, 이때 아내와 아이들의 배웅을 받는 행복감이란 그지없었다.

나는 유근창(육사2기·군단장·중장 예편)인사참모부장의 직속 기획처에 배속됐다. 곽철종 보직처장은 나를 부르더니 “내가 당신을 믿고 천거했으니 실력을 발휘해 보라”고 격려했다. 이처럼 작은 인연들이 알게 모르게 연결돼 나를 키우는 동력이 돼 준 것이다.

나는 육군의 각 부대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가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손실 병력 보충을 위한 전시 동원법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전후방 각 부대 단위로 전시 병력 보충 임무 수행을 위한 보충대를 창설했다. 이는 6·25 때 병력 보충이 어려워 가두 모병을 한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으로 노무자 관리 규정을 창안, 부대 계획 부록에 포함시켰다. 이것도 낙동강 최후 방어선 전투 때 노무자들을 동원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을 각급 부대에 배치했지만 죽거나 실종됐을 때 기록 관리상 처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개죽음인 것이다. 관리 규정을 둠으로써 노무자들도 현역과 같이 병적기록표를 작성, 그 전과를 기록·보존토록 했다.

전시에 야전병원과 이동 외과병원 부족으로 살릴 병사도 죽어 나가게 한 것도 두고두고 가슴 아팠다. 이 점도 고려해 민간 병원 징발 규정을 새롭게 정비했다.

이러한 정책이 입안·집행되는 것을 보고 나는 스스로 놀랐다. 펜대 하나로 수만 병력을 이동시키고 배치하는 힘. 이것은 또 다른 묘미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