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기 SCR694는 KBS에 주파수를 맞추면 무전기에서도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전방 부대에서는 이렇게 해서 방송을 듣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모르고 지냈다. 청취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것을 철저히 지켰을 뿐이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자정이 다 되어 함께 잤다. 다음날 아침, 그가 다시 무전기를 찾기에 갖다 주었더니 주파수를 맞추었다. 떨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로 시작되는 혁명공약 6개 항이 발표되고 있었다.
바로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해 발표된 공약이었다. 박중령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성공했구만”하고 기뻐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불쾌감을 갖고 박중령에게 물었다.
“박선배(그는 나보다 1기 선배였다), 나를 감시하러 온 거요, 뭐요?”
그제서야 그가 나를 찾은 진의를 설명했다.
“감시가 아니고 예하의 주요 부대 동향을 살피고 또 만일 거사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협조를 구하려고 왔소. 미안해.”
당시 전선에서는 북한의 남침 도발설이 유포됐고,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정봉욱 포병부장 지휘 아래 이한림 1군사령관이 서울 모처로 강제 압송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군은 5·16을 지지하는 편이었지만 1군사령관이 강제 압송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5·16이 성공하고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비롯 주요직에 임명되거나 추천한 사람이 발탁돼 나가면서 일시에 군대 내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무너졌다. 일부 장군과 장교들은 반혁명, 또는 비협조라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구속됐으며, 일부는 옷을 벗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5·16에서 현지임관 출신은 철저히 배제됐다. 현임 동기생들 중 5·16에 가담한 1, 2, 3급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에서 배운 대로 이행하는 이등병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고지식하고 원리 원칙에 투철한 결과였다. 나 역시 그랬다.
이때 ‘알래스카 군부세력’이 주로 축출됐다. 이북 출신 중에서도 함경도 출신을 알래스카 세력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반혁명에 연루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북 출신이 무너지고 영남 출신이 군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 계기가 된 것이다.
5·16은 육사 8기생이 중심 군맥이었다. 그리고 일부 동료 세력들이 물밑 접촉을 갖고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내세워 일으킨 거사였다. 세상이 흉흉한 탓으로 이들의 거사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5·16 후 고참 중령들이 옷을 많이 벗었다. 고참이라서 상급부대인 군단 포병사령관의 지시도 잘 안 듣고 놀면서 눈치만 살핀다고 해 군사령부는 고참 포병대대장 중 상당수를 바꿔치운 것이다.
이때 혁명 2급으로 활동한 정봉욱 대령이 군단과 야전군 포병대대장들을 일제히 교체했다. 나는 2군단 27사단 포병부사령관으로 전속됐다.
27사단장은 전부일 소장(육사 2기·군단장·중장 예편·전 병무청장)이었다. 그는 대전 2연대 중대장 출신으로 내가 하사관 때 모신 인연이 있는 장군이었다. 전장군은 나의 전입신고를 받더니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잘왔소. 우리 사단 포병이 군단 내에서 꼴찌요. 최중령이 훈련을 강화해 1등 포병으로 만드시오.”
2군단 내의 포병대대는 20여 개가 있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단 이○○포병사령관은 대령 때 보병에서 전과해 온 가짜 포병이오. 그러니 꼴찌를 한 거요.”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