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201>지휘통솔 適否審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0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201>지휘통솔 適否審

정구영 중령은 곧바로 총살형에 처해졌지만 이로 인해 전군의 각급 부대는 지휘·통솔상의 적부(適否)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지인용엄신덕(智仁勇嚴信德) 중 어느 것이 가장 좋은 지휘 덕목이냐는 논의가 있었는데 역시 지휘관은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후임 사단장은 이세호(육사2기·전 주월사령관·육참총장·대장 예편)준장이었다. 그의 사단 지휘 방법은 또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 당시 이준장은 33사단장으로 있었는데 갑자기 백선엽(대장 예편)육참총장의 부름을 받았다.“임자, 즉시 내 비행기를 타고 28사단장으로 부임하시오. 알겠소?”사태를 잘 모른 이사단장은 당황해하면서도 육참총장의 명령인지라 “넷, 사단에 들러서 준비해 곧 부임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사단에 들를 일이 아니라 당장 가시오.”
사태를 알아차리고 그는 곧바로 참모총장 전용 헬기를 타고 전곡 비행장에 내렸다. 그는 심적으로 준비가 안 된 데다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부대로 가는 대신 전곡의 한 여관에 들러 생각을 가다듬었다. 급할수록 모로 돌아간다는 말을 되새기며….

서정철 사단장의 피살 사건 이후 사단은 찬바람이 씽씽 불 정도로 차갑고 참모들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여서 그는 어떻게든 사단을 정상 궤도로 올려 놓는 일이 급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음 날 부임하자마자 엄명을 내렸다.“3일 후부터 예하 부대를 순시한다. 이때 열병·분열식을 보이라!”

그러나 부대가 열병·분열을 알 리가 없었다. 대대·연대 단위로 열병·분열식을 한번도 가져 보지 못한 데다 고도로 훈련된 부대가 몇 달을 준비해도 잘할까 말까 한 것이 이것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그런지라 모두 기를 쓰고 준비했다.

나는 977대대 연병장을 활용, 포를 트럭에 견인하고 포수를 승차시켜 연병장을 돌게 하며 분열식을 준비했다. 대대기와 각 포대기를 앞세우고, 병사들은 ‘빨간 마후라’를 착용하고 완전 무장한 채 대오를 갖춰 열병·분열 연습을 밤중까지 계속했다.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죽어 있던 각 부대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가 노린 것은 이것이었다. 군대란 사기를 먹고 사는 집단인데 공동묘지처럼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로는 안 된다고 보고 각 부대마다 단결해 함성이 나오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사단장은 체구가 장대한 데다 무표정하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어 무서운 장군으로 보였지만 막상 부딪쳐 보니 자상하고 덕이 많은 장군이었다.

나는 최우수 열병·분열 부대로 포상을 받았다. 아무리 거칠게 부하들을 다뤄도 신뢰를 바탕으로 인격적으로 대하면 얼마든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단장의 방침이 그것이었다. 사단장이 지휘관 회의 석상에서 부대 초도순시 결과를 발표하면서 977포병대대가 최우수 부대라고 발표하자 나는 당연히 부하들에게 공을 돌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단장은 보급 경제 운동(장비 애호 캠페인)을 벌였다. 국산품 애용 운동과 마찬가지로 군에서는 장비 애호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고, 이것도 애국 군대로서 당연한 임무였다.

그는 군대에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캠페인을 벌여 나갔다. 그것도 피부에 와 닿는 운동이었다. 직접 자기가 한 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니 누구나 즐겁게 동참하는 것이었다. 비록 조그맣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나 하나 움직이면 부대가 달라지고 나라가 좋아진다는 정신을 심어 주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이렇게 해서 사단은 안정을 되찾고 활기가 넘쳤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