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198>포상과 징벌 사이 -93-

화이트보스 2009. 5. 20. 17:09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198>포상과 징벌 사이 -93-

대대 군기를 확실히 잡아 나가는 중인데 갑자기 우리 부대를 5사단과 이동 교대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 북방 서화리에서 서부전선으로 옮겨 가는 장거리 이동이었다. 600명 가까운 대대 병력과 100여 대의 수송 차량·야포 이동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대대 참모 남구복(갑종)대위로 하여금 부대 이동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지만 현 상태로는 불가능하다는 보고였다. 내용을 알아보니 10여 대가 후생 사업(민간 대여)에 나가 있고 5~6대가 정비 불량, 7~8대가 D/L(죽은 차)로 돼 있어 서류상으로만 차량 100여 대 보유였을 뿐 20% 이상이 쓰지 못할 차량들로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동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한 끝에 병사들에게 이동 교육을 실시키로 했다. 불필요한 사물은 소각하고 쓸모없는 비품 역시 버리면서 1주일 동안 병사들의 이동 훈련을 배가시켜 나갔다.

떠나기 전날 나는 연병장에 전 장병을 집합시킨 후 운전병을 가운데 세워 놓고 고사를 지냈다. 대대장인 내가 제주(祭主)가 되고 한시(漢詩)를 잘 짓는 남대위가 한시 축문을 지어 읽고 돼지머리를 신께 바쳤다. 그리고 정신훈화를 했다.

“이동 차량 상태가 대단히 불비하다. 장거리 이동이 불안한데 대신 우리는 강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대로라면 별 사고 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운전병은 수통에 물 대신 반드시 커피를 타서 가득 채우고 조수대 선임자는 뾰족한 지휘봉을 갖고 운전병의 눈을 살펴라. 졸면 옆구리를 찔러라. 운전병은 무거운 철모 대신 전투모를 쓴다. 그리고 행군 50분에 휴식 10분이다. 쉴 때는 무조건 세수하라!”

스리쿼터에 15명, GMC에 20명이 타고 장비·포탄과 함께 우리 부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장장 13시간에 걸친 대이동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유일하게 무사고 이동 기록을 세웠다. 이 공으로 포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장거리 이동 때 모든 부대가 차량 전복, 계곡 추락, 압사 사고 등 최소 3~4건의 사고와 사상자가 나게 마련인데 우리는 한 사람의 낙오자나 차량 전복 없이 깔끔히 장거리 이동을 완료한 것이다. 이를 본 사단 참모장이 “비법이 뭐냐”고 물었다.

“고사와 커피입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실이 곧바로 사단에 보고되고 성공적 부대 이동 사례로 보고 대회를 갖기까지 했다. 이때 사단장이 훈시했다.

“처녀 대대장의 열성적인 노력의 결과다. 진심으로 장병을 다스리면 한 사람도 다치지 않는다. 병사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되 너무 쉬지 않게 하라. 휴식이 길면 두려움을 갖게 되고 휴식을 안 주면 지치게 된다.”

1957년 65포병대대장 취임 시절의 일이다. 보급 장교 여○○ 소위가 전임 대대장의 폐 질환 치료비를 댄다는 명목으로 보급품을 대량 팔아먹은 사고가 발생했다. 신임 대대장으로서 지휘 검열을 하고 있는데 쌀·휘발유가 상당량 증발해 버린 것을 감지했다. 창고에 가서 쌀가마니를 손가락으로 헤집어 보니 모래가 주르룩 쏟아져 나왔다. 가마니 수를 채우기 위해 개천의 모래를 가마니에 담아 쌓아 놓은 것이다.

예감이 이상해서 나는 다시 수송부로 달려갔다. 휘발유 재고 중 무작위로 몇 개의 드럼통 마개를 열어 바닥에 쏟아보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맹물이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100여 드럼 중 3분의 1이 그런 상태였다.

나는 곧바로 사단 감찰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자 겁먹은 여소위가 그날 밤 월북해 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그런 사고가 터진 것이다. 나는 ‘이제 끝이로구나’ 낙담하고 이주일(특임·대장 예편·전 감사원장)사단장 공관으로 지휘보고차 올라갔다. 얼마 전 무사고 이동으로 포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부하의 월북 사건으로 옷을 벗어야 하다니 이것이 군인의 운명인가.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