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아들이 태어날 것에 대비해 윤국(潤國)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았다. 윤자는 돌림자지만 기왕이면 부자 나라, 빛나는 나라의 주인공이 되라고 지은 이름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동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축하해 주었다.
나는 득남 턱으로 아껴 두었던 달러를 풀었다. 500cc 맥주 120잔이 나오는 생맥주 한 드럼을 100달러에 사서 전 동료에게 돌린 것이다(100달러는 당시 우리에게는 큰돈이다). 마차가 사람 키만한 맥주통을 실어 올 때 이를 지켜보던 나는 개선장군이 된 것 같았다. 미군 장교들이 “아들을 낳으면 그렇게 하느냐”며 신기해했다.
미 포병학교 유학은 우리 군의 전력 증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대전 교육을 받았고 지휘관으로서 갖춰야 할 체계적인 지휘통솔 기법을 익혔다. 그동안 일본군의 행동 수칙, 명령과 복종의 군대 문화를 최고의 가치로 알아온 우리는 비로소 미국식 군사교육과 민주군대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미국 유학을 통해 우리는 군 현대화의 초석이 됐다고 자부한다. 얼핏 보면 정치 전면에 나선 군인들이 크게 비쳐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일면적일 뿐 사실 우리처럼 전선에 묻혀 묵묵히 직무를 수행한 군인들에 의해 이 나라 국방의 틀이 잡혀 갔다고 생각한다. 그런 동기가 106명 중 지금은 30명 정도만 생존해 있다. 미 포병학교 5기 유학생이라 해서 ‘5미회’라 명명한 모임을 반세기 동안 이어 오고 있지만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다.
1954년 4월2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미 군용선이 부산항에 입항하자 나는 12사단 66포병대대장 보직 발령을 받았다. 도미 유학단 중에서 포병대대장 보직 명령을 받은 장교는 불과 3~4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영광스럽게도 그 일원이 됐다.
나는 이로부터 최장기(54~61년) 포병대대장 기록을 세웠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겠지만 육군대위에서 중령 때까지 포병대대장을 다섯 군데나 지낸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12사단 66대대장·79대대장·65대대장·977독립대대장·101독립대대장이 그것이다.
66포병대대장으로 부임할 당시 심히 못마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북청년단 출신의 노병들이 대대를 장악, 병사들을 사병(私兵)처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은 후환이 두려워 장교의 말보다 이들의 말을 더 듣고 있었다. 서북청년단 출신은 대개 노병들인 데다 끗발 있는 이북 출신 장교들이 뒤를 봐줘 더욱 행패가 심했다.
거기에 장교들의 보직도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 대대장도 대위이고 참모도 대위이며 포대장도 대위다. 이러니 장교들끼리 알력이 생기고 이런 위계질서 속에 나이 많은 서북청년단 출신 병사들이 툭하면 위세를 부리며 부사관이나 장교를 구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어느 날 작정하고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침대 몽둥이를 들고 순찰길에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한 내무반에서 고함과 비명이 들렸다. 나는 곧바로 천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들이닥치자 정말 목불인견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4~5명의 병사가 시비 끝에 신참 장교를 집단 구타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 그대로 멈춰 서라!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며 군기 위반이다. 당장 영창감이지만 신임 대대장으로서 한 번만은 기합으로 대신한다. 1인당 열 대씩 맞는다.”
나는 국방경비대식 기합법으로 분명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기합 내용을 복창토록 했다.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침대 몽둥이로 해당 병사들의 궁둥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여섯, 일곱까지 세고 그대로 까무러쳤다. 궁둥이 살점이 뜯겨져 나간 병사도 있었다. 기합을 주는 나도 팔이 얼얼했지만 꾹 참고 계속했다.
한창 나이에 힘깨나 쓴다는 나의 이런 기합법이 며칠 후 순식간에 대대에 퍼져 호랑이 같은 대대장이라는 소문이 왁자하게 돌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