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장군이 된 이등병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202> 3.15 부정선거와 좌천-97-

화이트보스 2009. 5. 20. 17:10
제2話 장군이된 이등병<202> 3.15 부정선거와 좌천-97-

보급경제운동은 다음 육군참모총장인 송요찬 장군에게로까지 이어졌다. 전군에 문맹 장병이 25%나 돼(6·25전쟁 때는 60%) 장병들 한글교육을 시키는 한편 쓰다 버린 드럼통을 절단해 가재도구를, 빈 통조림통으로 취사도구를 만들었으며, 나무 뿌리와 풀잎으로 소쿠리·광주리·꼴망태, 폐타이어로는 깔판을 만드는 등 폐품을 거의 버리지 않고 재활용했다.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농업이 70%)이어서 이 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어려운 국가경제를 돕는다는 자세를 견지했지만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상황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59년 말부터 불어닥친 정·부통령 선거운동에서 군은 알게 모르게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자유당 후보로는 대통령에 이승만 대통령, 부통령에 이기붕씨가 출마했고, 민주당은 대통령에 조병옥 박사, 부통령에 장면 박사가 출마했는데, 조병옥 박사가 유세 도중 지병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타계했다. 그래서 부통령 선거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자유당이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선거 당일 투표부정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당시 일선 각 부대에는 자유당 지지를 유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금일봉이 답지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이기붕 후보가 보내는 부대 위문금이라고 했다. 나는 이를 받아 예하 포대 대항 운동회 경비로 지출했다.그런데 3·15 선거 직후 ‘ 6군단 포병으로 28사단에 배속된 977포병대대의 선거 결과가 가장 나쁘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래서 징계를 당할까 마음을 잔뜩 졸이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내게 60년 4월 초 1군 포병부로 전속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위문금을 받았으나 누구에게서 온 것이라고 밝히지도 않았고, 또 누구를 찍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한 적도 없었다. 정치적 분위기에 편승하면 일시적으로 영광이 올지 모르지만 또 비참하게 무너지는 수가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우리 육군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군인은 군인일 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것만이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보직도 분명치 않은 1군 포병부로 발령이 나고 말았다. 이때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어떻게 비밀투표 결과가 곧바로 나오느냐는 것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결과가 알려질 수 있는데 미리 부대별로 속속들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내가 병사들에게 선거 관여에 해당하는 발언을 삼간 것은 977포병대대가 독립대대여서 타부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적 수준이 높아 이들의 저항이(암묵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있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우리 부대는 농촌 출신이라도 중·고교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나로서는 자유 비밀투표를 원칙대로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투철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사회나 후방 부대는 부정선거 사례가 많았다. 공개투표나 다름없이 진행됐는가 하면 올빼미 투표, 피아노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계수 부정, 야당표에서 여당표로 바꿔치기 등등 잡음이 많았다.

나는 좌천으로 마음이 무거운 가운데 잠시 서울 금호동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시가 동대문 시장 일대의 판자촌을 쓸어내면서 금호동에 철거민 수용소를 지었는데 이때 나도 수용소 언저리 산비탈에 땅을 사서 9평짜리 집을 지어 가족들이 살게 했었다. 이는 제대한 서울대 출신의 부하병사 안태화 군이 군납업체 용달사에 근무하면서 내게 정보를 주고 방 한 칸이라도 준비하라고 권유해 그를 통해 땅을 입수한 것이다. 금호동 집에서 나는 4·19 학생의거를 맞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08.17